참된
2009. 9. 30. 17:44
이곡을 듣습니다.(출처 피엘송닷컴 http://plsong.com/home.php)
이팝꽃
조혜영 글
김성만 곡
우듬지 노래
지금은 버려진 땅 그 끝자락
이팝꽃 꽃이 넘쳐 피었네
저 꽃이 피어나 보리 이삭 패이고
패어야 기운차게 씨앗도 뿌려
아름다운 희망을 주었던 꽃
참고 기다려야 좋은 시절도 오지
자갈밭 고르다 이팝꽃
하얗게 하얗게 피었네
아래는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http://workright.jinbo.net/)의 기관지 질라라비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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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화둥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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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우여곡절 끝에 대학이라는 데를 들어갔다. 입학식 날(입학식에 꼭 참석을 해야 되는 줄 알았다), 처음으로 학교를 가는 날이라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썼다. 혹여 같은 과 친구들이 촌놈이라고 우습게 볼까봐 더더욱. 바지는 진보라색 배바지(그 당시 우리 시골에서는 배바지가 인기짱이었다), 연분홍색 와이셔츠에 연노란색 재킷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의기양양하게 집을 나섰다. 영등포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도 목적지인 신촌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해서 기사 아저씨한테 확인을 해봤더니 반대편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는 것이다. 건너편에서 버스를 바꿔 타고 초초하게 아는 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워낙에 서울이라는 곳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복잡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순천에는 교통신호등이 딱 2개밖에 없었다. 서울은 크다고 하니 신호등이 많이 잡아서 50개는 되겠지 하는 내 생각은 서울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에 깨지고 말았던 아픈 기억이 있다. 한참 창밖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종점이라고 내리라고 한다. 주변을 살펴보니 마침 이화여대가 보였다. 여전히 방향감각은 없고, 입학식인 10시가 다돼가서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이화여대에서 서강대까지가 얼마나 먼지 가늠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무작정 기사 아저씨가 운전하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가도 서강대는 나오지 않았다. 기사 아저씨에게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면 저놈 촌놈이구나 라고 생각할 까봐 물어보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그렇게 30분을 달린 택시가 드디어 서강대 정문 앞에 도착했다. 자장면 세 그릇 값은 족히 될 택시비를 치르고 입학식이 거행되는 체육관으로 숨가쁘게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지금까지의 내 수고는 아는지 모르는지 입학식은 이미 끝나버리고,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출석은 부르지 않은 걸 확인하고서야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대학생활은 썩을 놈의 동정심 때문에 고난의 길로 들어서고야 말았다. 아지랑이가 유난히도 어지럽게 피던 봄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데 학생회관 주변에서 신입회원을 맞이하기 위한 서클들의 경쟁이 자못 심각했다. 신입생들도 호기심을 드러내며 여기저기 관심을 보였다. 다른 데는 신입생들이 북적대는데 유일하게 파리를 날리는 데가 있었다. 책상 위에 국악기 몇 개를 올려놓고 별다른 홍보도 하지 않고 맥없이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갑자기 동정심이 생겼다. 다가가서 악기를 신기한 듯 만져보니 그 사람이 악기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면서 은근슬쩍 서클에 들기를 권했다. 어차피 서클 하나는 들어야 하는데 그냥 여기 들어가버릴까 망설이고 있는데 그 선배가 결정타를 날렸다. 술은 원없이 먹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말없이 입회원서를 쓰고 말았다. ‘국악반’, 참 이름 하나는 거창했다.
처음에는 단소를 배웠다. 기본적인 국악 음계를 익히기 위한 필수과정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국악 음계는 ‘궁상각치우’라고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요 만만의 콩떡이다. ‘궁상각치우’는 중국 음계이고 한국 음계는 ‘황태중림남무’이다. 단소로 어느 정도 기본 음계를 익히고 나서 악기를 정해야 했다. 거문고를 선택했다. ‘백악지장’, 모든 악기의 으뜸이라는 말을 듣고 두말없이 결정했다. 국악기 연주는 보기보다는 훨씬 힘들었다. 한 달을 꼬박 배우고 나서야 겨우 거문고의 기본 음계를 익힐 수 있었다. 6개월 후에 공연이 잡히면서 본격적으로 훈련에 돌입했다. 곡목은 ‘수연장지곡’. 가장 기본적인 곡이라고 했다. 공연에서는 ‘수연장지곡’ 같은 ‘정악’만 연주하는 게 아니었다. ‘속악’이라고 분류되는 민요도 같이 했다. 비록 ‘전통민요’보다는 독재정권을 비웃고 풍자하는 ‘창작민요’나 ‘전통민요’를 개사한 곡이 전부였지만.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민요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는 민요가 정말 중요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민요는 한민족의 정서가 깊게 배어 있어서 민중들에게 거부감 없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이다. 선소리와 훗소리로 나누어져 있어서 창자와 관객이 같이 부르면서 소통을 할 수 있고,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 똑 같은 음이 반복되기 때문에 따라 부르기 쉽고,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편하다. 독창보다는 합창이 더 잘 어울리기 때문에 일체감을 형성하기도 좋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길 수 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공연이 가능하고 놀이가 가능하다.
91년 초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혼란기를 맞아 지방에서 헤매고 있을 때 ‘국악반’ 동기였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방에서 혼자 절망하고 있지 말고 안양으로 올라오라고. 거기는 손이 부족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태백산맥에 나오는 ‘소화’ 뺨치는 여성이 상근을 하고 있다는 말에 선배 결혼식을 핑계 삼아 무작정 상경을 감행했다. 선배 결혼식 다음날, 드디어 ‘안양민요연구회’라는 곳을 찾았다. 안양 중앙시장 뒤편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던 ‘안양민요연구회’.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막걸리 냄새가 밴 사무실, 꽹과리, 징, 장고, 북 등 악기와 각종 채, 공연복 등이 정리되어있는 강습실. 여기저기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는데 아침부터 웬 놈이 들이닥쳤다. 몇 마디 객쩍은 소리를 나누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판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그 인간과의 술판이 17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점심때가 지나서 웬 여성이 장구를 메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소화’란다. 속았다. 그는 ‘소화’가 아니라 딱 보기에도 ‘대화’였다. 그런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왠지 저 여성하고 엮일 것 같은. “저를 범하지 않으면 자결 하겠습니다”는 협박에 못이겨 어영부영 그 여성하고 결혼을 하고 말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여성은 만만한 남자만 보면 은장도로 협박을 했단다. 물론 거기에 넘어간 내가 바보긴 하지만.
‘안양민요연구회’에서 활동했던 경력 덕분에 민주노총 문화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일 처음 시작한 일이 민요패를 만드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의 조직망을 활용하여 수도권에 암약하고 있는 소리꾼들을 모을 생각이었다. 그때 당시 민주노총 조합원이 50만 명 가까이 되었으니 충분히 소리꾼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얼마 못가서 깨지고 말았다. 이리 고르고 저리 추려서 겨우 민요패를 꾸리긴 했지만 기량이 많이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안양민요연구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우듬지’가 탄생했다. 나무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우듬지’,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더 위로 쭉쭉 벋어나갈 ‘우듬지’, 참새나 뱁새가 아니라 봉황이 노닐 ‘우듬지’, 남한 유일의 노동자 민요패 ‘우듬지’.
‘우듬지’는 ‘우습지’라는 주변의 놀림 속에서도 꿋꿋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공연을 열심히 뛰고 있다. 물론 싼 맛에 부르기는 하지만. 모든 공연이 잊혀지지 않지만 기륭 동지들 지원 공연은 잊을 수가 없다. 곰도 100일 기도를 해서 사람이 되고, 1,000일이면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도 사람이 될 수 있다는데, 기륭 동지들의 투쟁은 1,000일이 지났건만 여전히 해결은 오리무중.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벌여 봤던 동지들이 또다시 구로역에 있는 시계탑을 점거하고 고공농성에 들어갔을 때 지원 공연을 가게 되었다. 그날따라 웬 비가 그렇게 오던지. 이런 날씨에 집회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하면서 구로역 광장으로 갔는데 웬 걸 비가 개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드디어 하늘도 기륭 동지들의 정성에 감동을 받았나 보다. 비록 모인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흥겹게 공연을 했다. 집회 마지막 순서로 시계탑 위에서 고공농성 중인 2명의 동지들과 촛불로 마무리를 하는 시간. 그 비좁은 공간에서. 일자로 펴진 공간이 아니고 둥글게 굽은 곳에서. 대소변도 맘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곳, 날씨도 지랄 같아서 비까지 내리는 밤. 힘이 빠져서 구호도 외치지 못하고 힘겹게 촛불을 흔드는 그들. 그 이름. ‘비정규직’. 자본주의의 마지막 발악에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맘껏 유린당하고 있는 그들. 비는 밤새 내렸다. 내 맘 속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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