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며

정말로 강력한 투쟁이 불가능 했는가?

참된 2009. 9. 21. 01:13

정말로 강력한 투쟁이 불가능 했는가?

[쌍용차 연속기고]‘오늘도 민주노총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2009-09-09 11시09분 임복균   미디어충청

 

 

그날의 함성과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 수도 없이 뱉어냈던 한숨과 눈물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데 77일간의 목숨을 건 투쟁이 그렇게 아프게 마무리 된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77일을 목숨 걸고 싸웠던 동지들은 도장 공장을 떠나 감옥과 세상 속으로 갔건만 용역과 구사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어제의 노동자들은 아직도 공장에 남아 조합원들의 공장출입을 막고 자본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

6월을 넘어 7월, 8월의 그렇게 뜨거웠던 여름도 가고 푸르른 하늘은 이제 가을을 얘기하고 있는데 우리들 가슴에 새겨진 쌍용차 투쟁의 상흔은 지워지지 않고 그 아픔을 더해가고 있다. 이는 지난 77일과 똑같이 쌍용차 동지들을 고립시켜놓은 채 스스로의 비겁함을 감추고 자기를 변명하기 위한 공허하고 부끄러운 논쟁만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77일간의 목숨을 건 투쟁이 있던 그 기간 과연 우리는 제대로 된 싸움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제대로 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제 다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77일간의 옥쇄파업 투쟁은 끝났을망정 쌍용차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자본과의 전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안에서 쌍용차 동지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때론 정문 앞에서, 때로는 평택의 거리에서 한없이 기다리기도 하고 무작정 뛰고 싸우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는 쌍용차 동지들을 엄호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을 만들지도 못했고 전선을 확장하지도 못했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결의대회는 무기력함 그 자체였고 대중조직이 오히려 대중들의 투쟁의지를 꺾어놓는 역할을 하는 현장을 확인했을 뿐이다.

금속노조는 중재자 역할만... '복덕방도 아니면서'

강철대오라고 불리던 금속노조는 중재자 역할에 충실했을 뿐 투쟁의 당사자로서 투쟁의 전선을 확장해가지 못했으며 몇 번에 걸친 결의대회도 그저 의례적인 수준에서 진행됐을 뿐 제대로 된 투쟁을 준비할 의지도 투쟁을 만들어갈 실력도 없음을 드러냈다.

경찰과 용역 그리고 구사대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선 쌍용차 동지들의 처절한 투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에 걸 맞는 투쟁을 만들어가지 못한 것은 15만 금속산별의 존재이유마저 의심케 만드는 것이었다. 평택의 거리에서 만난 금속은 남한 노동운동의 강력한 투쟁의 상징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 볕에 시들은 길가의 옥수수 잎처럼 무기력하고 힘없는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평택역에서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공장까지 5km 넘는 거리를 행진하여 참가자들의 기운을 모조리 빼놓고는 멀리 공장 굴뚝위의 붉은 깃발이 보이는 다리위에 멈춰서 다리를 넘어설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가 전경들이 전진해 오자 감히 싸울 엄두도 못 내고 다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다리를 넘어 경찰을 뚫고 공장으로 진입할 용기도 실력도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7월 22일 민주노총 총파업 돌입 첫날, 금속노조 결의대회 / 미디어충청 자료사진

그렇다면 1500만 노동자의 중심, 80만 조합원을 자랑하는 민주노총은 어떠했는가?

우리는 평택역에서의 위원장 발언을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동지들! 공장안에선 쌍용차 동지들이 살인적인 진압에 맞서 결사의 각오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동지들! 화염병을 들고, 파이프를 들고 죽기를 각오로 싸우실 수 있겠습니까?’
‘그럴 자신이 없다면 오늘만은 내 지침에 따라 행동해 주십시오.’ ‘별도의 행동을 하지 말고 지침에 따라주십시오.’ 라고 외치던 그 발언을…….

처음부터 화염병 들고 파이프 들고 싸울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싸워야 한다면, 정말로 공장안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면, 두려워도 겁이 나도 화염병도 들고 파이프도 들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위원장이라면 최소한 ‘공장안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동지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 내가 선두에 설 테니 동지들! 두렵더라도 함께 공장으로 진격하자’고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대중들의 투쟁의지를 꺾어버리고 쌍용차 동지들의 목숨 건 투쟁을 엄호하기 위해 강력한 투쟁을 요구하는 대중들을 탓하는 모습에서 노조상층 관료들의 현재모습을 확인했다.
대중 스스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두려워 그 시도조차 차단하려하는 의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단결과 투쟁을 강조하던 금속은, 민주노총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공장 쪽으로 전진하기를 거부하는 민주노총 깃발을 이끌고 스스로 선봉대가 된 대중들의 자발적 투쟁의지를 가로막고 형식적인 결의대회로 스스로의 책임은 다했다고 생색내려 하는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공조직들의 행태에서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를 발견한다.

집회 참가자들이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벌일 때 금속의 지도부도 민주노총의 지도부도 그곳엔 없었고 그렇게 조직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싸움은 물대포에서 쏘아댄 최루액과 전경들의 질주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오늘도 민주노총이 경찰들에게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우리의 무기력한 투쟁은 구사대들의 놀림거리가 됐으며 그러한 무기력한 투쟁이 반복되자 우리를 향해 전진하는 전경들의 얼굴에선 같잖다는 비웃음이 생겨났다.

우리는 기억한다.
공장에서 들려오던 구사대들의 선무방송 소리를...
‘오늘도 금속노조가 경찰들에게 쫓겨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아직도 금속노조를 믿으십니까?’ ‘오늘도 민주노총이 경찰들에게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연대와 단결 그리고 투쟁을 얘기하던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의 모습을 보셨습니까?’ ‘아직도 그들을 믿고 그들을 기다리십니까?’

결의대회가 있던 날마다 울려 퍼지던 구사대의 선무방송 소리에 우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아니라고 말하기 위한 투쟁을 만들어가지 못하고 쌍차 투쟁의 옥쇄파업 전술이 잘못 됐다는 둥, 과격한 투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보다 당초의 협상안이 훨씬 낫다는 둥, 스스로의 비겁함을 정당화하는 얘기들이 지금도 금속과 민주노총 상층 관료들의 입에서, 글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한 구사대의 선무방송이 잘못됐다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금속과 민주노총이 회피한 투쟁이 경찰들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던 그때 공장안에선 30명이 300명을 물리치고 정문까지 진출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집행부만 탓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과연 안에서 싸우는 동지들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결의를 다지기는 했던 것인지.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만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준비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각자가 속한 대중조직 안에서 투쟁을 조직할 순 없었던 것인지, 알게 모르게 우리 또한 대중조직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백 명이 모였을 때나, 천 명이 모였을 때나, 5-6천 명이 모였을 때나
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몇 만이 모이면 뭐할까?
우리 스스로 투쟁에 대한 결기를 세워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무기력한 투쟁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목숨을 건 투쟁이 다시 요구된다고 해도 강력한 투쟁을 만들어가지 못하고 오늘처럼 무기력하게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중조직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부족함과 잘못을 모두 덮으려하지 말자.

강력한 투쟁을 만들어 가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강력한 투쟁을 만들어 가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금속지도부가 자본과 쌍차지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쌍용차 투쟁의 주체가 되어 투쟁을 만들어 갔다면 이 투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금속위원장이 도장 공장에 투쟁본부를 차리고 옥쇄투쟁을 결의하며 15만 조합원들에게 쌍용차 투쟁의 본질을 알려내고, 강력한 투쟁의 최전선에서서 투쟁을 호소하였더라면 다리를 건너 공장으로 우리는 진입할 수 있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 쌍용차 공장에 투쟁본부를 설치하고 자본과의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겠다고 천명하며 80만 조합원들에게 쌍용차 투쟁에 연대해 줄 것을 요구했더라면 투쟁의 전선은 확장 되었을 것이며 평택을 넘어 서울의 거리에서 80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강력한 투쟁을 만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조합원들의 상태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지 말자. 먼저 투쟁의 최전선에서 화염병을 들고, 파이프를 들고 조합원들에게 요구하였다면 위원장과 함께 최전선에 서서 싸울 각오가 되어있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아직도 많이 있다.

공장안에선 목숨을 건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경찰과 용역 그리고 구사대의 살인적인 진압작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쌍용차 위기의 책임은 자본과 정권에 있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스스로 투쟁의 전선에 서서 자본과 정권의 공세에 맞서 쌍용차 동지들을 엄호하고 투쟁의 전선을 확장해 나가는데 함께하자고 요구했다면 두렵지만, 어렵고 힘들지만 그 투쟁에 함께했을 것이다.

어제의 선수들이 “쌍용차 니들은 과거에 바로 옆에서 투쟁하는 사업장에도 제대로 연대한 적이 있나?” “쌍용차에서 같이 한솥밥 먹던 다수의 조합원들도 같이 싸우기는커녕 적이 돼 있는데 남의 집 사람들한테서 뭘 바라나.”라고 냉소하며 스스로의 비겁함을 포장하지 않았더라면 자본의 공세에 맞선 투쟁의 전범을 만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공장안 동지들의 결기를 밖에 있던 우리들이 받아 안고 우리 또한 목숨을 건 투쟁을 만들어 갔더라면 이 투쟁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쌍용차 투쟁을 자신의 투쟁으로 받아 안아 공장 안과 밖이 결사의 각오로 투쟁을 함께 만들어 갔다면 요즘 유행어인 ‘MB정권 퇴진’을 외치지 않고도 MB정권을 끝장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쌍용차의 투쟁은 많은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줬다.
이제 우리는 그 과제를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쌍차 투쟁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투쟁의 시작이다.

그래서 대중조직에게, 동지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요구한다.
첫째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등 대중조직은 조합원을 탓하기 전에 상층 지도부부터 투쟁의 결기를 세우고 자본에 대한 투쟁의 선봉에 설 것을 요구한다.

둘째로 승리를 확신하는 투쟁만을 할 수는 없다. 투쟁은 이길 수 있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이 요구되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다. 투쟁의 결과를 예단하지 말고 투쟁해야 한다면, 목숨 건 투쟁이 요구된다면 쌍용차 동지들의 투쟁보다 더 강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다시 목숨을 건 투쟁이 요구된다면 그 투쟁을 회피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셋째로 쌍용차 투쟁은 총자본과 총 노동의 전쟁이었음을 인정하자.
그렇기에 쌍용차 동지들의 투쟁이 자본과 노동의 전쟁이었음을 인정한다면 “쌍용차 니들은 과거에 바로 옆에서 투쟁하는 사업장에도 제대로 연대한 적이 있나?” 라는 얘기는 더 이상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애써 어제의 얘기를 핑계 대며 스스로의 비겁함을 숨기지 말자. 차라리 비겁해서 미안했다고, 쌍용차 투쟁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자기고백을 하고 앞으로의 투쟁을 만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얘기하며 단위사업장에 묶여 있는 한 자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대중은 지도부를 핑계대고 지도부는 대중을 핑계 대며 투쟁들을 개별화 시키고 공장안으로, 단사내로 고립시키는 한 자본과 정권을 넘어설 수 없다.
여론을 얘기하며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부르짖는 한 강력한 투쟁은 만들어질 수 없다. 숱하게 널린 투쟁현장들을 외면하고 자본의 공세와 폭력 그리고 이간질에 중독되어 저항의 의지마저 상실한다면 그 자리엔 자본에 의해 짓밟힌 노동자들의 처절한 삶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도 자본과 정권은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쌍용차 투쟁을 왜곡하고 쌍용차 동지들을 탄압하면서 노동진영을 압박하고 있다. 앞으로 구조조정에 대한 싸움은 하지 말라고…….
다시 또 쌍용차 동지들을 고립시켜놓고 공허한 논쟁만 계속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자본의 구조조정 칼날에 쓰러져 가는 동지들과 그들의 요구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순응하는 자본의 꼭두각시뿐일 것이다.
쌍용차 투쟁은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자본은 사회적 연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굴종을 강요하며 노동자들에게 사람이기를 포기할 것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에게 노동자와의 연대는 없음을 확인했다면 이제 우리도 허황된 사회적 연대와 국민을 얘기하지 말고 노동자의 요구를 가지고 자본에 대항해 싸워나가야 한다.
우리 스스로 사람이기를 주장하고 사람으로 남아 있기를 염원한다면 각자의 울타리에 갇혀있지 말고 자본과 정권에 대항해 함께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싸워야만 될 이유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싸움을 준비하자. 누군가 죽어주기를 자본이 강요한다면 함께 살기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렇게 싸워야할 이유가 분명하다면 싸움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가 개별화되는 것을 보며 저들은 박수치며 좋아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의 투쟁의지를 강고하게 다져나가 대중조직들의 투쟁을 견인해 내도록하자.
그럴 때만이 쌍용차 투쟁을 끝이 아닌 시작으로, 패배가 아닌 승리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