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며
"절반의 승리, 이제부터 채워간다(2008.12.16)
참된
2009. 7. 10. 18:39
“계속 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들의 꿈은 소박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한 대가로 한 달에 고작 80만원을 받을지라도 회사에서 계속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악법 중에 악법’이라는 비정규직법의 시행을 앞둔 지난해 6월, 비정규직이던 그들은 그 소박한 꿈마저 이룰 수 없게 됐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지 않기 위해 ‘18개월 이상 일한 사원은 정규직으로 간주한다’는 단협을 무시하고 조합원들을 일방적으로 해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랜드 그룹 계열사인 뉴코아·홈에버 매장에서 800여 명의 노동자가 거리로 내몰렸다.
그들의 꿈은 소박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한 대가로 한 달에 고작 80만원을 받을지라도 회사에서 계속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악법 중에 악법’이라는 비정규직법의 시행을 앞둔 지난해 6월, 비정규직이던 그들은 그 소박한 꿈마저 이룰 수 없게 됐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지 않기 위해 ‘18개월 이상 일한 사원은 정규직으로 간주한다’는 단협을 무시하고 조합원들을 일방적으로 해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랜드 그룹 계열사인 뉴코아·홈에버 매장에서 800여 명의 노동자가 거리로 내몰렸다.

이랜드노조와 함께했던 사람들.ⓒ 민중의소리
이에 맞서 이랜드일반노조(이랜드노조)는 지난해 6월 23일 홈에버 상암점을 점거하면서 파업 투쟁을 시작했다. 하루만에 끝난 1차 점거 농성 이후 30일부터 시작된 2차 점거 농성. 애초 1박2일로 예정된 점거 농성은 조합원들의 분노를 담아 무기한 농성으로 바뀌었다. 7월 20일 경찰병력이 침탈하기까지 점거 농성은 20여 일 동안 이어졌다.
경찰이 동시에 진행한 홈에버 상암점과 뉴코아 강남점 농성장 침탈 과정에서 640여 명이 연행되고 구속자만 수십 명에 달했다. 각종 손배 가압류 및 벌금도 넘쳐났다. 파업 초기 600여 명이던 투쟁 대오는 침탈이 자행되고 투쟁이 길어질수록 점점 줄어들어 186 명이 됐다.
이탈한 조합원들 중에는 회사로 복귀한 사람도 있었지만 퇴사한 사람이 더 많았다. 그들을 옥죄던 건 ‘생계비’문제였다. 대부분 가장 노릇을 하는 여성 노동자였기에 생계를 위해 투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은 조합원들은 힘들어도 ‘동지’들을 믿고, ‘연대의 힘’을 믿고 지금까지 왔다.
지난 13일,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이랜드 투쟁과 지역연대, 새로운 길찾기’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이경옥(32) 월드컵분회 조합원은 “처음 파업 투쟁 시작할 땐, 연대 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디서 저렇게 많이 오나’ 궁금했고, 저들이 우리를 이용하려는 건 아닌가 의심도 들었어요”라며 투쟁 초기에 가졌던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을 바꾸자!’라는 현수막을 보면서는 ‘난 세상을 바꾸려고 이러는 건 아닌데, 뭔가 잘못 엮인 거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이들이 사심없이 우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함께 한다는 걸 알게 됐죠. 그만 두고 싶을 때, 연대 동지들 생각에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이랜드일반노조와 사측 홈플러스테스코는 14일 노사화합조인식을 열고 합의문에 서명했다.ⓒ 민중의소리
지난 11월 13일, 이랜드 기업으로부터 이랜드홈에버를 인수한 홈플러스테스코(주)와 이랜드 일반노조는 마침내 노사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홈플러스테스코는 16개월 이상 일한 사원들을 무기계약직으로 간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170여 명의 조합원들이 다시 회사로 복귀해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징계 해고된 간부 12명은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이었다. 이랜드노조의 말 그대로 ‘절반의 승리’다.
또한 지난 9일 문성현 민주노동당 전 대표가 이랜드홈에버 매장에서 당원들을 동원해 영업을 방해하고 불법집회를 주최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 됐고,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이 쇠고기 반대 집회 주도와 함께 이랜드 매장 점거 투쟁 주도 혐의로 구속 됐다. 그리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 걸린 가압류도 여전하다.
그래도 그들은 ‘승리’했다. 생계비 문제를 이겨냈고, 동지들을 믿었고, 연대 동지들을 만들어냈다. 20일 동안 점거 농성을 하다 경찰한테 끌려 나가면서도 ‘소박한 꿈’을 접지 않았기에 그들은 ‘승리’했다.
다시 매장에서 그들을 만나다
1년 반만에 다시 회사로 돌아간 그들의 마음이 어떨까? 파업이 마무리된 지 꼭 한달만인 지난 13일, 약속도 없이 무작정 홈플러스 월드컵점(전 홈에버 상암점)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너무 즐겁습니다. 투쟁할 때도 즐거웠고, 복귀한 지금도 즐거워요. 복귀한 지 이제 20일 조금 넘었는데 기존 사원들보다 복귀한 조합원들이 오히려 더 활기차요. 회사에 대한 애정도 더 커진 것 같고요. 저도 그렇거든요.”

월드컵분회 맏언니 양명희 조합원. 그는 상암점 점거 농성 때 투쟁하는 이들에게 맛있는 밥을 지어줬다.ⓒ 민중의소리
지난 해 점거 농성이 한창이던 상암점에 다녀갔던 사람들이라면 양명희(57)조합원을 기억할 것이다. 연대 온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던, 그래서 ‘밥언니, 식당언니’라 불리던 양명희 조합원. 정년을 3년 남겨놓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투쟁에 동참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굳이 파업에 동참할 필요가 있었냐고 묻는 ‘한심한’ 질문에 그는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해야죠. 내 동료들이랑 같이 해야죠. 안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 파업하면서 빚도 졌죠. 하지만 아이들 공부 다 시켜서 그나마 괜찮았어요. 전 일도 투쟁도 즐겼습니다. 생계비가 나온다면 죽을 때까지도 투쟁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생계비가 없어도 해야 하는 거죠. 이제 그동안 빚진 거 부지런히 일해서 갚아야 해요.”
상품을 진열하는 그의 손이 바쁘다. 상품 번호를 확인해 하나 하나 줄을 맞춰 나란히 올려놓는 그에게 식구들 반응은 어땠는지 물어봤다.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저보고 ‘끝까지 싸우라’고 독려해줬어요.”라며 웃음을 보인다.
매출 1위 매장 사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하던 그에게 지난해 7월 1일 떨어진 해고통지서는 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가 내 아이들의 문제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멀리 용인에서 2시간 30분 걸려 출퇴근한다는, 입사 5년차 사원인 그는 남은 기간 동안 일하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사랑하는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함께하지 못하는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간부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할 겁니다. 우리 (김경욱)위원장님은 우리가 열심히 일하기를 바라니까요.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그 분들이 들어올 여지가 생기지 않겠어요?”
“투쟁하면서 우리가 바보처럼 살았구나 느꼈어요”
같은 매장 농산물 코너에서 일하는 최승진(38) 조합원은 요즘 바쁘다. 1년 반 동안 파업을 하면서 무뎌진 손끝 감각을 살려야하기 때문이다.
“맨 처음 매장에 딱 들어섰을 때 뭐부터 해야 되는지 감이 안 오는 거 있죠. 지금 간만에 까대기(물건을 나르거나 진열대에 정리하는 것을 뜻하는 은어)하는 건데 어렵네요. 그래도 하던 게 있으니 금방 익숙해지겠죠 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손놀림이 매우 부지런하다. 복귀한 소감부터 물었다.
“저도 기쁘지만,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 모습을 다시 봤을 때 짠하고 기분이 좋더라고요. 어려움을 같이 이겨내서 그런지 한가족 같아요.”
그에게 파업을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 물어보자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해고자도 아닌데 500일 동안 파업한다는 게 대단한 거라고들 하더라고요. 맨 처음엔 점거하면 바로 해결날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하다보니까 이렇게 길어진 건데, 투쟁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바보처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점점 들었죠. 그래서 끝까지했어요. 그런데요, 마지막 문화제하던 날 저는 안 울었어요. 눈물이 안 나더라고요. 난 울면 어쩌나 했는데… 제가 독한가봐요.”
이번엔 뻔한 질문을 던졌다. 복귀하던 날 주위 사람들 중 누가 가장 기뻐하더냐고.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나온다.
“지대위(이랜드노조 월드컵분회 지원대책위) 분들이요. 우리 엄마는 실감이 안 나서 그런지 반응이 그냥 그렇더라고요. 왜냐면 제가 그랬거든요. 아무래도 지도부들이 해고 되고 그 사람들 희생으로 들어온 거니까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엄마한테 ‘우리가 이겼어’라고 안 하고 그냥 복귀한다고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엄마가 그냥 그런가보다 하신 거죠.”
민주노동당 마포, 서대문, 은평, 용산구 위원회가 시작해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한 지대위는 이후 진보신당과 사회진보연대 등 다양한 지역 단체들로 연대범위를 넓히며 이랜드 투쟁을 지원해왔다.
“지대위가 해산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분들이 평생 우리에게 에프터서비스 해준다고 했어요(웃음). 그런데 그분들이 우리보다도 더 많이 시원섭섭해하시는 것 같아요. 온 힘과 정을 다 쏟아서 그런지 몰라도 무척 힘들어 하시더군요. 그분들이 걱정하시는 거 알기에 더 잘하고 싶어요.”
“점거 농성,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마음 아파”
그가 저울 앞에 섰다. 이야기 도중 쉴새없이 그를 찾는 손님들. 그는 일일이 웃으며 대꾸해준다. 손님에게야 그저 한 번의 물음뿐이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니 같은 물음, 반복되는 일… 쉬운 게 아니다 싶다. 굳이 가격표를 달지 않아도 되는 물건임에도 가지고 와서 가격표를 붙여 달라는 손님들도 있다. 봉지 입구를 묶어 오면 좋으련만 그냥 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일일이 비닐봉지를 묶어주다 보니 손목이 쉬질 못한다.
“그래도 해야죠. 내 동료들이랑 같이 해야죠. 안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 파업하면서 빚도 졌죠. 하지만 아이들 공부 다 시켜서 그나마 괜찮았어요. 전 일도 투쟁도 즐겼습니다. 생계비가 나온다면 죽을 때까지도 투쟁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생계비가 없어도 해야 하는 거죠. 이제 그동안 빚진 거 부지런히 일해서 갚아야 해요.”
상품을 진열하는 그의 손이 바쁘다. 상품 번호를 확인해 하나 하나 줄을 맞춰 나란히 올려놓는 그에게 식구들 반응은 어땠는지 물어봤다.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저보고 ‘끝까지 싸우라’고 독려해줬어요.”라며 웃음을 보인다.
매출 1위 매장 사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하던 그에게 지난해 7월 1일 떨어진 해고통지서는 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가 내 아이들의 문제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멀리 용인에서 2시간 30분 걸려 출퇴근한다는, 입사 5년차 사원인 그는 남은 기간 동안 일하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사랑하는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함께하지 못하는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간부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할 겁니다. 우리 (김경욱)위원장님은 우리가 열심히 일하기를 바라니까요.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그 분들이 들어올 여지가 생기지 않겠어요?”
“투쟁하면서 우리가 바보처럼 살았구나 느꼈어요”
같은 매장 농산물 코너에서 일하는 최승진(38) 조합원은 요즘 바쁘다. 1년 반 동안 파업을 하면서 무뎌진 손끝 감각을 살려야하기 때문이다.
“맨 처음 매장에 딱 들어섰을 때 뭐부터 해야 되는지 감이 안 오는 거 있죠. 지금 간만에 까대기(물건을 나르거나 진열대에 정리하는 것을 뜻하는 은어)하는 건데 어렵네요. 그래도 하던 게 있으니 금방 익숙해지겠죠 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손놀림이 매우 부지런하다. 복귀한 소감부터 물었다.
“저도 기쁘지만,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 모습을 다시 봤을 때 짠하고 기분이 좋더라고요. 어려움을 같이 이겨내서 그런지 한가족 같아요.”
그에게 파업을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 물어보자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해고자도 아닌데 500일 동안 파업한다는 게 대단한 거라고들 하더라고요. 맨 처음엔 점거하면 바로 해결날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하다보니까 이렇게 길어진 건데, 투쟁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바보처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점점 들었죠. 그래서 끝까지했어요. 그런데요, 마지막 문화제하던 날 저는 안 울었어요. 눈물이 안 나더라고요. 난 울면 어쩌나 했는데… 제가 독한가봐요.”
이번엔 뻔한 질문을 던졌다. 복귀하던 날 주위 사람들 중 누가 가장 기뻐하더냐고.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나온다.
“지대위(이랜드노조 월드컵분회 지원대책위) 분들이요. 우리 엄마는 실감이 안 나서 그런지 반응이 그냥 그렇더라고요. 왜냐면 제가 그랬거든요. 아무래도 지도부들이 해고 되고 그 사람들 희생으로 들어온 거니까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엄마한테 ‘우리가 이겼어’라고 안 하고 그냥 복귀한다고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엄마가 그냥 그런가보다 하신 거죠.”
민주노동당 마포, 서대문, 은평, 용산구 위원회가 시작해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한 지대위는 이후 진보신당과 사회진보연대 등 다양한 지역 단체들로 연대범위를 넓히며 이랜드 투쟁을 지원해왔다.
“지대위가 해산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분들이 평생 우리에게 에프터서비스 해준다고 했어요(웃음). 그런데 그분들이 우리보다도 더 많이 시원섭섭해하시는 것 같아요. 온 힘과 정을 다 쏟아서 그런지 몰라도 무척 힘들어 하시더군요. 그분들이 걱정하시는 거 알기에 더 잘하고 싶어요.”
“점거 농성,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마음 아파”
그가 저울 앞에 섰다. 이야기 도중 쉴새없이 그를 찾는 손님들. 그는 일일이 웃으며 대꾸해준다. 손님에게야 그저 한 번의 물음뿐이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니 같은 물음, 반복되는 일… 쉬운 게 아니다 싶다. 굳이 가격표를 달지 않아도 되는 물건임에도 가지고 와서 가격표를 붙여 달라는 손님들도 있다. 봉지 입구를 묶어 오면 좋으련만 그냥 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일일이 비닐봉지를 묶어주다 보니 손목이 쉬질 못한다.

마지막 문화제 때에도 울지 않았다는 그가, 지난 여름 점거 농성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였다.ⓒ 민중의소리
“손목이 아프기 시작한 게 홈에버 때부터였던 듯해요. 명절이면 선물 세트를 팔잖아요. 왜 그거 있죠? 7.5킬로가 넘는 큰 상자. 그걸 들고 나르면서부터 손목이 안 좋아지더라고요. 게다가 날마다 이렇게 비닐봉지 묶는 작업을 계속하다보니 손목에서 뚜두둑 소리가 나요.”
병원에는 가봤냐고 묻는 말에 “병원 갈 시간도 없지만, 치료 받아도 그때뿐이에요. 그냥 살아야죠 뭐. 손님들이 봉지에 채소나 과일 담아 오실 때 묶어서 가져 오시면 좀 덜할 텐데… 그래도 이게 우리 일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또 손목을 돌려 봉지를 묶는다. 미리 묶어서 오는 손님은 열 명 중 한 명 꼴. 더구나 오늘은 귤이 싸서 귤을 잔뜩 가지고 오는 손님들이 많다. 무거운 걸 저울에 올리고, 가격표를 출력해 붙이고, 봉지 입구를 묶고, 다시 무거운 걸 들어서 손님에게 전해주는 일이 반복된다.
그런 그에게 지난 여름에 대해 물었다.
“점거 농성 때요? 처음엔 괜찮았어요. 냉방도 됐고, 나갈 수도 있었고. 또 그동안 서로 몰랐던 조합원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좋았어요. 농성장이 털릴 무렵 전기를 끊었다던데 전 털리기 열흘 전부터 여기 못 있었거든요. 그때 집으로 가정통신문이 갔어요. ‘사랑하는 이랜드리테일 가족 여러분께’로 시작하는 협박 편지였죠. 그걸 보신 엄마가 난리가 난 거죠. 그래서 7월 10일날 나가게 됐어요. 그리고 털리던 날 다시 왔는데….”
그가 운다. 마지막 문화제 때도 울지 않았다는 그가. 스스로 독해서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사진기를 들이대는 기자에게 “기자라는 직업은 이래서 참 나쁘다”면서 울다 웃는다. 그리고 또다시 귤 봉지를 묶는다. 울면서도, 이야기를 하면서도 쉬지 못하는 그의 손목, 그리고 그는 젖은 눈으로 손님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같이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마음이 아파요. 비록 엄마 때문에 평택 언니 집으로 쫓겨 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소식을 모르진 않았으니까 마음이 편치 않았죠. 그래서 7월 20일부터는 정말이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왔어요. 뭔 정신으로 달렸는지 몰라요. 그때 여름이 무척 더웠을 텐데도 다들 뭔가에 미친 듯이 진짜 열심히 했죠. 그때는 뭐 여름이었으니까 물대포 맞아도 시원하고… .”
병원에는 가봤냐고 묻는 말에 “병원 갈 시간도 없지만, 치료 받아도 그때뿐이에요. 그냥 살아야죠 뭐. 손님들이 봉지에 채소나 과일 담아 오실 때 묶어서 가져 오시면 좀 덜할 텐데… 그래도 이게 우리 일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또 손목을 돌려 봉지를 묶는다. 미리 묶어서 오는 손님은 열 명 중 한 명 꼴. 더구나 오늘은 귤이 싸서 귤을 잔뜩 가지고 오는 손님들이 많다. 무거운 걸 저울에 올리고, 가격표를 출력해 붙이고, 봉지 입구를 묶고, 다시 무거운 걸 들어서 손님에게 전해주는 일이 반복된다.
그런 그에게 지난 여름에 대해 물었다.
“점거 농성 때요? 처음엔 괜찮았어요. 냉방도 됐고, 나갈 수도 있었고. 또 그동안 서로 몰랐던 조합원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좋았어요. 농성장이 털릴 무렵 전기를 끊었다던데 전 털리기 열흘 전부터 여기 못 있었거든요. 그때 집으로 가정통신문이 갔어요. ‘사랑하는 이랜드리테일 가족 여러분께’로 시작하는 협박 편지였죠. 그걸 보신 엄마가 난리가 난 거죠. 그래서 7월 10일날 나가게 됐어요. 그리고 털리던 날 다시 왔는데….”
그가 운다. 마지막 문화제 때도 울지 않았다는 그가. 스스로 독해서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사진기를 들이대는 기자에게 “기자라는 직업은 이래서 참 나쁘다”면서 울다 웃는다. 그리고 또다시 귤 봉지를 묶는다. 울면서도, 이야기를 하면서도 쉬지 못하는 그의 손목, 그리고 그는 젖은 눈으로 손님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같이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마음이 아파요. 비록 엄마 때문에 평택 언니 집으로 쫓겨 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소식을 모르진 않았으니까 마음이 편치 않았죠. 그래서 7월 20일부터는 정말이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왔어요. 뭔 정신으로 달렸는지 몰라요. 그때 여름이 무척 더웠을 텐데도 다들 뭔가에 미친 듯이 진짜 열심히 했죠. 그때는 뭐 여름이었으니까 물대포 맞아도 시원하고… .”

지난해 7월 20일, 경찰은 공권력을 투입해 상암점에서 점거 농성 중인 조합원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민중의소리
또다시 울 것 같은 그의 눈을 보고 일주일에 두 번 연습을 한다는 노래패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두 달 전 꾸려진 분회 노래패 ‘비상’ 회원이다. ‘비상’은 이랜드노조 월드컵분회 노래패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홈플러스노조 월드컵분회 노래패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어제는 6명이 연습했어요. 다들 시작할 때는 서로 객원가수라, 잠깐만 할 거라고 했지만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해요. 공연한다고 공연비도 받았거든요. 노래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이랜드’ 노래패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릴 찾아 주시는 거겠죠.”
‘‘진짜 노동자’가 된 그들. 이제 날개 달고 날다
파업 이후 변한 게 있냐는 물음에 그는 세상을 보는 눈이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라는 걸 알게 됐어요. 무조건 참아서만은 안 된다는 것도요. 경찰에 대해서도 ‘민중의 지팡이’라고만 생각했지, 한 번도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요. 욕도 많이 늘었죠.(웃음)”
착하게만 살면 되는 줄 알았다가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았을 때 느끼는 세상에 대한 배신감, 그런 걸 온 몸으로 느끼게 되었으니 후회는 없을까?
“후회라뇨? 누가 떠밀어서 한 것도 아니고 제가 한 일인데요. 노동자대회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 부르고 구호 외치고 팔뚝질하는 모습, 내가 투쟁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봤겠어요? 그리고 언니들하고 함께하면서 서로 속속들이 친하게 됐잖아요. 매장에서는 일하기 바빠 서로 얼굴만 보고 인사하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이번에 투쟁하면서 많이 알게 됐죠. 동지들이 생겼다는 게 얼마나 좋은데요.”
1년 반 전엔 어색했을 ‘팔뚝질’, ‘동지’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막힘없이 나온다. 아주 자연스럽게. 어느 새 그는 ‘착한 노동자’에서 ‘진짜 노동자’가 된 것이다.
“솔직히 우리가 완벽하게 승리해서 들어왔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김경욱 위원장님을 비롯한 간부들의 희생이 있었으니까요. 위원장님은 우리한테 부모나 다름없었고, 우리는 간부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는데…. 이제 나머지는 우리가 채워야죠. 그래야 그분들과 또 함께할 수 있겠죠.”

14일 열린 마지막 문화제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월드컵분회 노래패 '비상'ⓒ 민중의소리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그를 보면서 노사합의 조인식 다음 날 이랜드 노조 홈페이지에서 본 글을 떠올렸다.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이제 저희 조합원들은 510일 파업투쟁을 뒤로 하고 꿈에도 그리던 일터로 돌아갑니다. 소중한 간부들의 희생을 가슴아파하며 생존을 위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먼저 복귀한 동지들과 지금 돌아가는 동지들, 돌아가지 못하는 동지들 모두 마음은 하나입니다. 하나인 만큼 간부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연대 동지들과 장기투쟁사업장 동지들을 떠올리면서 저희 조합원들은 현장에서도 꺾이지 않고 노조를 재건하고 새롭게 출발하겠습니다.
오늘의 민중의소리 HOT 뉴스
·기사입력 : 2008-12-16 01:46:42 ·최종업데이트 : 2008-12-18 10:2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