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학

[실록민주화운동] 63. 노동과 문학(2004.7.11)

참된 2009. 7. 7. 17:28

[실록민주화운동] 63. 노동과 문학

경향신문     2004-07-11

 

 

1991년 3월12일, 신문을 펼쳐든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사진 속 한 사람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수갑이 채워진 채 수사관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무어라 거세게 외치는 얼굴. 그것은 바로 10년 가까이 ‘얼굴이 없던 시인’ 박노해의 얼굴이었다.


베일에 가려졌던 그의 신상명세도 공개됐다. 본명 박기평. ‘노해’는 필명으로 ‘노동해방’을 뜻했다. 57년 전남 함평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상경, 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하고 섬유·금속·정비 노동자로 일했다. 경기 안양에서 서울 개포동까지 운행하는 98번 버스를 몰기도 했다. 83년 ‘시와 경제’ 제2집에 ‘시다의 꿈’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 간행. 89년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창설,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안기부에 검거됐다.

전태일 이후 한 사람의 노동자가 그토록 많은 시선을 끈 적이 있었을까.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노동의 새벽’ 일부)

우선 문단이 경악했다. 그의 시는 한 편 한 편이 비수였다. 참혹한 노동 현실을 소름이 끼칠 정도로 핍진하게 그려낸 것이다. 나아가 그의 시는 지식인 시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수 없는 지점에 이미 도달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투철한 계급적 자기인식 때문이었다. 박노해 이전에는 아무도 이 땅의 노동자에게 지문이 없다는 사실을 쓴 적이 없었으며(박노해의 시 ‘지문이 없다’ 참조), 철야 작업을 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이불 빨래를 시키는 남성 노동자들의 봉건성에 대해서 쓴 적도 없었다(박노해의 시 ‘이불을 꿰매면서’ 참조). 그는 계급적 증오를 뜨뜻미지근하게 포장하지도 않았다. 그의 시에는 서릿발 같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손무덤’ 일부)

그의 등장을 두고 민족문학 진영에서는 문학의 신원(출신)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많은 젊은 이론가들은 박노해를 하나의 예로 들면서 이제 민족문학은 민중문학(또는 민중적 민족문학)으로 중심을 이동해야 하며, 이때 당연히 노동자·농민 등 민중이 새로운 문학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적 이론가 백낙청은 “집필자의 신원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작품을 저자 개인의 제품으로 보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꼴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당연히 빠른 속도로 ‘좌경화’하는 민족문학의 경향성에 일정하게 제동을 거는 비판적 언술이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노동문학이 80년대 문학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만큼 세력을 확장했다는 사실이었다. 노동자들은 이제 스스로 문학의 주체가 됐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옮겨내는 수기 작업이 압도적이었다.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송효순의 ‘서울로 가는 길’,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 장남수의 ‘빼앗긴 일터’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씌어진 생생한 증언록들이었다.

“‘왜? 왜 그래 언니? 무슨 일이야?’ 나도 급하게 물었다. ‘똥… 똥, 밖에 똥…’ ‘뭐, 뭐라구? 똥이 어쨌다는 거야?’ ‘빨리 노조 사무실에 가 봐. 문명순과… 남자 새끼들이… 똥을 뿌리고 난리가 났어.’ 이 말만 겨우 마치고 순이 언니는 급히 뛰어나갔다. 사건은 이렇게 터지고 마는구나. 나의 온몸은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쌍년아, 네까짓 게 도망가면 어디까지 갈 테야? 내가 옛날에 육상 선수였던 걸 모르느냐?’ 얼마 못 가서 도망치던 사람은 무지막지한 사내의 손에 잡히고 말았는지 ‘아악, 욱’ 하는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눈과 귀, 콧구멍, 부라쟈 속까지 마구 쑤셔넣는 광경이 비명소리를 통하여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공장의 불빛’ 중에서)

80년대 중반부터는 노동자들이 문단에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철근 노동자 김해화·김기홍, 철도노동자 김명환, 운수노동자 최명자, 그리고 울산 현대중공업의 백무산은 박노해와 더불어 노동문학의 새 지평을 연 대표적인 노동자 시인들이었다.

“철근쟁이 연수야 성국아 오연아// 한차례 파업이 휩쓸고 간 공사장/ 너무 쉽게 패배한 싸움 끝에/ 쫓겨가는 우리들과 남아있는 너희들/ 누구는 새로 반장이 되고 누구는/ 새로 조장이 되어서/ 불순분자 박반장 씹새끼 김조장…/ 개 같은 총무에게 맞장구쳐/ 마음껏 떠나간 우리를 씹을지라도/ 통닭에 갈비를 뜯고 맥주를 마시고/ 몇 푼 일당을 올려 받고 새로 생긴/ 수당을 챙겨 넣을지라도/ 잊지 말거라/ 장마통 함바의 소주잔으로/ 막걸리 잔으로/ 뜨겁게 주고받은 노가다 해방의 세상/ 우리들 빛나는 노동의 꿈을/ 부디 잊지 말거라”(김해화, ‘인부수첩29’ 일부)

노동계급만이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노동문학의 점진적인 발전조차 프티 부르주아적이라고 하여 거세게 비판했다. 89년 3월, 지금은 호프집, 분식집, 숯불갈비집으로 빼곡히 들어찬 연세대 앞 먹자골목, 옛 ‘오늘의 책’ 서점 바로 뒷골목에 있는 한 상가건물 5층에서 ‘노동해방문학’이라는 월간 문학지가 태어났다. 그것은 노동문학이 계급적 성격을 가장 극적으로 천명한 사례였다.

박노해를 비롯해 문학평론가 조정환, 시인 김사인 등이 그 잡지를 주도했는데, 그들은 창간호를 내자마자 안기부의 집중적인 추적을 받아야 했다. 아니, 추적은 창간 이전부터 시작됐다. ‘가라 자본가 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이라는 구호가 박힌 창간 예고 광고가 한겨레신문에 5단 통광고로 실렸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창간호가 나왔을 때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상승하는 투쟁과 맞물린 창간호는 약 2만부를 찍어 거의 전 권이 순식간에 소화됐다.

“1988년 12월 신촌 사무실에서 약 20명이 모인 가운데 노동문학사 창립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김사인을 발행인으로 선출하고 백무산·정인화·정남영·임규찬·임홍배·조정환 등을 포함한 편집위원회가 꾸려졌다. 창간 예고 홍보물과 신문에 실린 창간 예고 광고를 보고 결합하러 온 활동가들 혹은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 ‘노동계급 그룹’ 혹은 다른 정파그룹에서 파견된 사람들도 있었다.… 당국의 추적을 받고 있던 박노해의 시와 선동문은 유입 경로를 숨기기 위해 사원들조차 알 수 없는 인편으로 투고를 했다.”(조정환, ‘진보적 사회를 위한 금지된 열정’, 대산문화 통권 7호, 2004)

‘겁도 없는’ 이런 움직임은 87년 6월항쟁에 뒤이은 7·8월 노동자대투쟁의 어쩌면 당연한 결과물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노동자들은 더 이상 역사의 뒷전에 머물러 있는, 허울만 좋은 산업역군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문학에서도 당당히 선봉에 서기를 자처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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