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사람

'민들레 홀씨' 되어 망월동에 잠든 '박종태'

참된 2009. 6. 21. 17:50

'민들레 홀씨' 되어 망월동에 잠든 '박종태'

고 박종태 열사 눈물의 영결식..."잘가, 이제는 고생하지마"

 

이재진 기자 besties@vop.co.kr   민중의 소리
 
 
 
 
박종태 열사 영결식

20일 오전 11시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에서 고 박종태 열사의 영결식이 열렸다.ⓒ 민중의소리


오열 속에 치러진 장례식이었다.

52일만에 장례를 치르고 그는 그렇게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화물연대 광주지부 1지회장 박종태. 지난 4월 30일 그는 “저의 죽음이 얼마큼의 영향을 줄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동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속에 저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그로부터 한달이 넘는 시간. 박종태 열사는 화물연대 총파업을 이끌어냈고, 해고자 전원을 원직 복직시켰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앞에는 '노동해방 열사'라는 칭호가 붙었다.

눈물의 영결식

20일 오전 11시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에서 그의 영결식이 열렸다. 그의 시신이 안치됐던 대전 중앙병원에서 발인식을 거행하고 대전지사까지 행진한 2000여명의 노동계 인사와 시민들은 눈물의 영결식으로 그를 하늘로 돌려보냈다.

전국 노동자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서 참석자들은 박종태라는 이름 석자를 목놓아 불렀다.

백기완 선생은 “나는 오늘 박종태 동지를 땅에 묻으려고 이곳에 오지 않았소, 이 땅에 묻을 것은 당신이 아니라 썩어 문드러진 금호그룹과 이명박 정권이 아니겠소”라고 말했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일곱 살 정하가 아빠를 영영 잊지는 않을까, 열 살 혜주가 아빠 없이 학교에서 기죽고 살지나 않을까 마지막 순간까지 걱정을 놓지 못하면서도 동지들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이, 그 동지들에게 무엇이 그리도 죄송했나”라고 되물었다.

임 위원장은 “끝까지 싸워 이겨달라는 동지의 넋이 남은 자의 함성으로, 산 자의 투쟁으로 이어져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 그 때 동지의 영전 앞에서 다시 승리를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를 대신해 무대에 오른 홍희덕 의원은 “우리의 부족함이 완전한 승리를 만들지 못했다. 100만 특수고용노동자들에 대한 비참한 처지가 세상에 알려졌지만 여전히 노동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했다”며 “그래서인지 오늘 당신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여전히 무겁다. 그러나 당신의 영정 앞에 맺은 약속, 끝까지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동료와 후대를 위해서 역사의 열매가 아니라 거름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동지에게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며 “박종태 동지, 비록 그 몸은 오늘 우리 곁을 떠나더라도 동지의 영혼은 사랑하는 가족과 우리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안식하소서”라고 말했다.

이날 영결식 도중 비가 내리면서 장례 분위기는 더욱 슬픔의 한 가운데로 내달렸다.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눈물과 빗물이 섞여 흘러내렸다.

박종태 열사 영결식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추도사에서 “78명이나 되는 생목숨이 해고당했는데 1인시위마저 철저하게 가로막힌 그 절망의 벽을 죽어서야 훨훨 넘어선 한 사람이 간다. 평범하게 살기가 가장 힘든 나라에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동지가 이제 영영 간다”라고 흐느끼자 일부 참석자들은 오열을 터뜨리며 머리를 숙였다.ⓒ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영결식

20일 박종태 열사의 영결식이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에서 열렸다.ⓒ 민중의소리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추도사에서 “78명이나 되는 생목숨이 해고당했는데 1인시위마저 철저하게 가로막힌 그 절망의 벽을 죽어서야 훨훨 넘어선 한 사람이 간다. 평범하게 살기가 가장 힘든 나라에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동지가 이제 영영 간다”라고 흐느끼자 일부 참석자들은 오열을 터뜨리며 머리를 숙였다.

발인식부터 고인의 관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던 아내 하수진 씨는 담담히 영결식 무대에 올라 머리를 숙이고 짧은 말을 남겼다.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노동자가 주인이 되지 않는 한 남편을 가슴에 묻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남편을 기억하는 그날까지 여러분의 사랑과 의리도 기억하겠습니다.”

대전지사 앞에서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민들레처럼’이 울려퍼지자 사람들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불렀다.

"잘가, 이제는 고생하지마!"

영결식을 끝마친 참석자들은 박종태 열사의 고향인 광주로 이동해 화물연대 광주1지회, 화물연대 광주지부, 박종태 열사 자택, 대한통운 광주 지사 앞에서 운구행렬을 펼쳤다.

광주 금남로 삼복서점 앞에서 열린 ‘노동탄압 분쇄, 노동기본권 쟁취, 노동열사 고 박종태 추모노제’에서 고인을 잃은 슬픔은 이어졌다.

박종태 열사 영결식

영결식이 진행되자 고 박종태 열사의 딸 해주가 부인 하수진씨의 품에 안겨 울고 있다.ⓒ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영결식

박종태 열사 영결식ⓒ 민중의소리


‘친구 생일날 생전 부르지 않았던 노래를 부르고 단돈 5만원을 주고 사라진 박종태 조합원’이라는 글귀로 시작된 추모 영상에서 환하게 웃고, 투쟁하고, 머리를 숙인 박종태 열사의 사진이 떠올랐다.

추모객 2000여명은 비를 맞으며 묵묵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그가 고향을 떠나는 길을 지켰다.

강승철 민주노총 광주본부장은 “혜주와 정하가 어른이 될 때 특수고용직이 없어지고 노동기본권이 보장되는 그런 세상을 맞이해 당신을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빠로 기억되게 할 것”이라고 추도했다.

“남편이 사랑했던 광주”라며 무대에 오른 하수진씨는 “지난 50일은 남편이 살아있는 듯한 꿈같은 시간이었다. 이제야 남편을 보냈다”고 울먹였다.

저녁 8시가 넘어서야 고인은 망월동 구묘역에 묻혔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노조 광주지부장이었던 이용석 열사 묘지 뒤로 고인의 묘가 마련됐다.

시신이 담긴 관이 땅 속으로 들어가고 유족들은 '눈물의 삽'을 떴다. 이어 대한통운 택배지회 조합원들이 흙을 밟는 ‘달구질’을 하고 제가 이어졌다.

박종태 열사 망월동 묘역 안장

저녁 9시경 박종태 열사의 묘지가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 민중의소리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고문은 추도사를 통해 “아무리 대의와 명분이 뚜렷해도 그의 아내는 남편을 잃었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잃었고, 부모는 아들을 잃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동지를 잃었다”고 말했다.

오 고문은 “노동자가 생산의 주역이 되고 왜 권력의 주역이 될 수 없는가. 끊임없이 연대하자 , 연대연합의 함대를 만들어 자주의 민중정부를 세우자”고 호소했다.

하수진 씨는 자녀와 함께 절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했다.

“잘 가서 잘 지켜봐줘, 이제는 고생하지마!”

박종태 열사 영결식

고 박종태 열사 아들 정하가 영결식을 지켜보고 있다.ⓒ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영결식

영결식에 앞서 대전 중앙병원에서 발인식을 거행하고 참석자 2000여명은 대한통운 대전지사까지 행진했다.ⓒ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영결식

영결식에 앞서 대전 중앙병원에서 발인식을 거행하고 참석자 2000여명은 대한통운 대전지사까지 행진했다.ⓒ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영결식

영결식에 앞서 대전 중앙병원에서 발인식을 거행하고 참석자 2000여명은 대한통운 대전지사까지 행진했다.ⓒ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영결식

영결식에서 고 박종태 열사를 기리는 진혼무를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추모 노제

광주 금남로 삼복서점 앞에서 열린 ‘노동탄압 분쇄, 노동기본권 쟁취, 노동열사 고 박종태 추모노제’에서 고인을 잃은 슬픔은 이어졌다.ⓒ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추모 노제

박종태 열사 추모 노제ⓒ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추모 노제

박종태 열사 추모 노제ⓒ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망월동 묘역 안장

박종태 열사 유가족이 제를 올리고 있다.ⓒ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망월동 묘역 안장

제를 올린 후 박종태 열사의 유품을 태우고 있다.ⓒ 민중의소리


박종태 열사 망월동 묘역 안장

박종태 열사 망월동 묘역 안장ⓒ 민중의소리

 

 

 

기사입력 : 2009-06-21 03:20:31 ·최종업데이트 : 2009-06-21 10:3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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