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며
[기획인터뷰3] 김영선 KTX열차승무지부 상황실장(2008.12.31)
참된
2009. 2. 25. 03:39
KTX 탑승까지 한 걸음 더
[기획인터뷰3] 김영선 KTX열차승무지부 상황실장
[기획인터뷰3] 참세상은 촛불의 해를 보내며 2008년을 달구었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봤습니다. 더 큰 촛불의 2009년을 전망합니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와 네티즌 안단테, KTX열차승무지부 김영선 상황실장에 이어 1월 1일 GM대우차비정규직지회 이대우 지회장, 1월 5일 기륭공대위 소속 '함께맞는비'의 이상욱, 1월 6일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 순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자
석 달 후면 파업 3년. 한창 투쟁하던 때의 파업 대오는 4백 명을 넘은 적도 있다. 해고된 KTX승무원들은 서울 용산역 부근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강당과 사무실에 스티로폼을 촘촘히 깔고 다닥다닥 붙어 자며 두 번의 겨울을 났다. 2008년 들어 파업 조합원이 서른 네명으로 줄었지만 더 이상의 이탈 없이 오롯이 남아 “철도공사가 전 KTX승무원들의 사용자”라는 법원 판결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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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선 KTX열차승무지부 상황실장/ 김용욱 기자 |
끝이 보일 듯 안 보이는 터널을 지나온 KTX승무원들은 “축하한다”는 주변의 호들갑에도 오히려 차분하다. “곧 해결될 거다”는 말도 백 퍼센트 믿지는 않는다. 다만 “KTX열차에서 다시 승무원으로 일할 것”이라는 믿음만 있다. 올해 겨울 KTX승무원들은 스스로에게 3년 만의 첫 휴가를 줬다. 기륭분회 동지들과 함께 내년 초에는 일터에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키우면서.
김영선 KTX열차승무지부 상황실장을 파업 승무원 숙소이기도 한 용산역 부근 철해투(철도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 사무실에서 30일 만났다. 아래는 김영선 상황실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지난 법원 판결 이후 후속조치는 어떻게 돼 가고 있나. 조합원들은 최근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남아 있는 34명에 대해서만 가처분 판결이 났고 본안 소송에 들어가게 됐다. 같이 해고됐던 밖의 다른 친구들까지 모아서 함께 소송에 들어가려 하고 백 명 가량 모은 상태다. 판결이 나온 후에 그래도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많은 분들은 좋은 판결이 나왔다고 축하한다고, 좋지 않냐고 하시는데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인권위 발표 때나 그 전의 판결들 나왔을 때도 별반 다를 것 없이 똑같이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3년간 투쟁하면서 한 번도 쉬지 못해서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면서 각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있는 중이다. 중간중간 상황을 공유하면서 철도노조 새 집행부나 철도공사 새 사장에 따라 내년 투쟁계획을 짜게 될 것이다.
본안 소송 결과가 어떻게 될까. 승무원으로 복직할 가능성에 대해선
가처분 결과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승무원으로 일하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았고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지난 3년간 별의별 투쟁을 다 했는데 결과적으론 사법부 판단에 의해 희망이 생겼다
교섭으로 풀 수 있을거란 생각에 그동안 소송을 하지 않았는데 3년이 지나다 보니 투쟁의 기한이 하루이틀 길어지는게 두렵지 않았다. 법원 판결도 3년 동안 투쟁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다. 투쟁 천 일 이전에 소송을 걸었다면 이번같은 결과가 안 나왔을 수도 있다.
오랜 기간 투쟁하면서 4백 명에서 서른 네 명으로 대오가 줄었다. 많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남을 수 있던 서른 네 명의 원동력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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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욱 기자 |
일하고 싶었던 것. KTX승무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 동지들이 떠나가는 게 가장 힘들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시작도 같이 했으니 끝도 함께 보자는 하나의 목표를 갖고 왔다.
중간에 이탈한 조합원들을 원망하진 않았나
처음에는 그랬다. 그 분들이 이탈하지 않았다면 빨리 끝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했고. 이탈자가 늘수록 회사의 회유 협박도 늘어서 더 그랬다. 그런데 3년을 두고 보니 힘들어하는 친구들은 늘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런 힘듬이 그 사람(이탈자)들은 조금 더 전에 왔을 수도 있겠다고 다들 생각한다.
3년의 투쟁 동안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지
마지막에 했던 철탑투쟁(올해 9월 서울역 부근 철탑 고공농성)이다. 마지막에 했던 투쟁이라 더 생각이 날 수도 있지만 서른 네 명 모두가 정말 최선을 다했고 후회도 없다. 새마을호 승무원들과 분리하는 회사의 안이 나왔을 때 새마을 동지들에게 미안함도 있었지만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우리 입장도 이해시켜야 했고 그 점이 굉장히 힘들었다. 당시 조합원들 중에서도 그만 끝내고 회사가 가라는 자회사로 가자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냐’며 서로가 서로를 설득한 6시간의 회의, 그 날이 가장 힘들었다.
오랜 투쟁 과정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기륭 동지들. 내가 나중에 복직이 돼서 뭔가를 하더라도 그 분들은 마음 속에 계속 남을 것 같다. 같은 여성 사업장이고 투쟁을 우리보다 2백 일 정도 앞서 시작했고. 처음 3.8여성의날 집회(2006년)에서 기륭 동지들을 만났을 때 충격이 굉장히 컸다. 그때 은미 동지(최은미 기륭분회 조합원)가 발언에서 머리카락이 (구사대에) 뽑혔다고 말하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우리나라에 저렇게까지 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그 충격 때문에 나간 조합원들도 많았다. 50명 정도.
그 집회 이후 지금까지 기륭과는 계속 함께 해 왔다. 지금도 새로운 사옥으로 이전했다는 이야기도 듣고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연락한다. 마음도 가장 짠하게 아프고 뭘 해도 내 일처럼 아프고. 우리 조합원들도 ‘기륭은 우리보다 하루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다. 항상 마음 속의 동지다.
장투사업장이던 코스콤비정규지부는 엊그제 합의했다. 남아있는 다른 비정규직 장투사업장 동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젠 거의 기륭이랑 우리밖에 안 남은 것 같다. 어제 뉴스를 보니 코스콤이 합의했다고 나오던데 순간 드는 생각은 또 우리랑 기륭만 안되네. 항상 그랬다. 누군가 합의했다고 하면 또 역시 우리만 안돼. 그런 게 많았다. 내년 초에는 우리도 기륭도 현장에서 봤으면 좋겠다. 우리는 KTX에서, 기륭은 기륭 사업장에서, 이랜드는 마트에 가서 그분들을 만났으면 좋겠고. 코스콤도 증권거래소에 갔을 때 아는 얼굴이 맞이해 주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판결이 나서 180만 원을 매달 받게 되고 좋지 않냐고들 하지만 우린 돈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일하고 싶은 마음이다. 많은 분들이 편하게 있으라고 하는데 편안하지만은 않다. 이 평화가 언제나 뒤집혀 왔기 때문에 불안감이 굉장히 많고. 코스콤과 모두 다 투쟁의 현장이 아닌 일터에서 만나고 싶다. 정말 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