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 진보진영에 큰 상처... 결국 박근혜만 득 봤다"
[진보4당 핵심활동가 집담회 ①] 신뢰 잃은 진보정치, 원인은 무엇인가14.08.31 18:05최종 업데이트 14.09.01 09:15
진보정치의 희망은 있는가? 6·4지방선거와 7·30 재보궐선거 이후 정치적 주변화에 내몰린 한국 진보정치에 대한 조롱과 냉소가 만연하다. 정치전문가들 역시 수많은 주문을 쏟아내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조언은 대부분 '외부 시각'에 머문다. 당사자들은 진보정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전망할까? 몇 차례에 걸쳐 진보정치 당사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본다. - 기자 말
"이런 국회의원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4년 총선 이전, 민주노동당의 유인물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문구다. 진보정당 의원 1명이 없었던 시절, 그들은 노동자와 힘없는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새로운 정치를 꿈꿨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자부심은 충만했다. 살아온 배경과 이념적 지향이 다른 사람들이 '공동의 꿈'을 매개로 모였고, 서로를 같은 뜻을 품은 '동지(同志)'라 불렀다.
단 한 명의 '이런 국회의원'을 소망하던 진보정치는 2004년 총선에서 10명, 2008년 총선에서 5명, 2012년 총선에서 13명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맞이했다. 문제는 추세다. 2010년 지방선거에 민주당과 선거연대에 임한 민주노동당은 기초단체장 3석을 포함 모두 142개의 의석을 얻었고, 대부분 독자노선을 고수했던 진보신당은 25개의 의석을 건졌다. 그러나 2014년 6·4지방선거에서는 진보정당 의석을 모두 합쳐 55석에 머물렀다. 기초단체장은 1석도 없고 광역의원도 고작 4개(통합진보당 3개, 노동당 1개)뿐이다.
'위기'는 단지 선거결과로만 진단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정치의제에서 진보정당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모두 모아도 '소수정당'인 진보정당이 4개로 찢어져 있고, 이 정당에 포함되지 않은 '진보정치운동세력'도 상당수다. 더 이상 독자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진단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과연 진보정치의 희망은 있을까?
지난 8월 25일, 합정동에서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 통합진보당 핵심 활동가들이 모였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로 분열을 거듭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구)민주노동당 시절 김종철(노동당)과 이보아(녹색당)는 당내 평등파로, 정연욱(정의당)과 정태흥(진보당)은 자주파로 분류됐다.
이들이 나눈 화두는 두 개다. 진보정치의 '평가', 그리고 '전망'.
"신뢰 사라진 것이 진보정치 위기의 원인이자 결과"
- 오늘 집담회에는 모두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모였다. 지금은 2008년 분당, 2012년 분당 등 큰 사건 이후 녹색당, 노동당, 정의당, 통합진보당에서 각자 활동하고 있다. 직접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민주노동당에서의 활동 경험과 지금 역할을 이야기 해주시면 좋겠다.
정연욱(정의당) : "1997년 전국연합에서 국민승리21로 파견되어 정책국장을 맡으면서 진보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민주노동당에는 2001년 입당했다. 김종철씨가 2002년 용산구청장으로 출마할 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고, 2004년 민주노동당 총선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 당 사무부총장과 문성현 대표 비서실장을 거쳐 지방자치위원회 부위원장을 했다.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 때 탈당해서 정의당으로 왔다. 용산지역위원장으로, 지난 지방선거에서 구청장 후보로 출마했다."
정태흥(진보당) :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민주노동당에는 2002년에 입당했고, 2002년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았다. 2005년에는 중앙당 기획국장을 맡았고 2008년 성북구에서 총선 후보로 출마했다. 2010년에 민주노동당 전략기획실장이었고, 2012년 총선에서 성북구(갑)에, 2013년 재보궐 선거에서 노원(병)에 출마했다. 6·4 지방선거에서는 서울시장 후보였다. 지금은 통합진보당 서울시당 위원장이다."
김종철(노동당) : "1999년에 권영길 대표 비서로 국민승리21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과 대변인을 맡았고, 용산지구당 위원장을 했다. 2004년에는 최고위원 겸 연수원장, 2006년에는 서울시장 후보였고 2008년 분당 때 탈당해 진보신당에 참여했다. 2010년에는 진보신당 대변인을 했고, 2011년에 진보신당이 쪼개지면서(2011년 9월, 당내 간판 스타 정치인인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전 의원을 비롯한 당원1~2천명이 진보신당을 탈당해 통합진보당 창당 흐름에 합류했다-기자 말) 2012년에 총선후보로 나갔고, 이번 재보궐 후보로도 출마했다. 공직선거 후보만 5번인데, 당직선거까지 포함하면 선거로 점철된 나날들이었다.(웃음)"
이보아(녹색당) : "민주노동당은 2003년에 입당했다. 당시 민주노총 공공연맹 산하 건설엔지니어링 노조에서 활동하다 다시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로 옮겨 활동하면서 정당활동을 병행했다. 2004년에는 중앙당 대의원을 했고 2006년 소위 '강남좌파'들이 모여 있는 강남구 위원회 사무국장을 했다.(웃음) 2008년 분당할 때 탈당해서 당적 없이 지내다가 2011년 8월 녹색당 창당 준비 시점부터 상근자로 활동했다. 2012년 총선 후 상근을 그만두고 2013년에 탈핵특별위원회를 제안했더니 '제안한 사람이 위원장 하라'고 해서 위원장이 됐다. 가위·바위·보 잘 해서 녹색당 대의원대회 부의장도 했다(녹색당 대의원대회는 전원 추첨으로 선출되는데 의장단은 추천받은 후보 중에서 가위·바위·보로 선정했다- 기자 말).(웃음)"
- 한 정당에 있던 분들이 네 정당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진보정치의 굴곡을 보여주는 것 같다. 먼저 현재 진보정치의 상황을 각 당에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듣고 싶다. 6·4지방선거와 7·30재보궐 선거 이후 진보정치의 위기라는 진단이 팽배하다.
김종철 : "노동당은 내부적으로 보면 2011년 지도부 탈당 이후에 당세가 줄어들고 유력정치인이 없어지면서 '그 당은 뭔가'하는 시선을 많이 느낀다. 솔직히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독자적 진보정당으로 길게 보고 가야한다는 생각은 한다. 당 내에서는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진보재편을 해서 활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과 성급하게 하기보다 갖출 것을 먼저 갖춰야 한다는 입장이 나오고 있지만 둘이 꼭 대립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진보재편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웃음)"
-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원인이 뭐라고 평가하나?
김종철 : "원인과 결과가 사실 같다. 대중이 진보정당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원인인데, 그게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의 내용이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새정치연합의 내용이 진보정당들의 내용보다 훌륭해 보이는 것도 별로 없고. 새정치연합은 반새누리당 정서에서 그나마 제일 센 조직이라는 위상 때문에 지지를 얻고 있는 것 아닌가? 진보정당의 내용이 위기는 아닌데, 진보정당을 지지하더라도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겠냐는 신뢰의 위기가 있다."
정태흥 : "통합진보당은 2012년 총선 직후에 비례경선부정 관련 사태부터 그 해 9월 분당 사태까지 겪었고, 민주노총이 배타적 지지방침을 철회한 조건에서 박근혜 정부의 외적인 탄압이 계속 있었다. 2013년에 8월 28일 내란음모 사건에 이어 11월 5일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 청구 제소까지 진행됐다. 통합진보당 이름으로 지방선거에 출마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과 위기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출마해 시의원 비례 기준으로 4.3%, 백만 표를 얻었다. 최악의 조건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을 지켜낼 기반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다."
- 통합진보당 내부에서는 선거 평가를 둘러싸고 이견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정태흥 : "울산·부산·경남 등 과거 진보벨트를 형성한 곳에서는 우리가 항상 2당 역할을 했었는데, 이번에 현역 의원이 상당수 낙마했고 3당이 됐다. 호남에서도 우리는 2당이었는데 전북 같은 곳에서는 3당이 됐고 수도권에서는 기초의원 1명만 당선됐다. 이런 데서 오는 위기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강제로 당이 해산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설 기반을 마련하긴 했지만, 곳곳에 위기징후가 존재하기 때문에 힘과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보아 : "우리는 이번이 두 번째 선거였다. 2012년 총선은 창당과 동시에 치른 선거다. 다른 진보정당은 10년의 역사가 있지만, 우리는 창당 자체가 기성 정당과 다른 새로움을 기대한 분들이 모였다. 다른 정당보다 조직적 기반이 없는데, 이게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다. 부정적인 면은 조직적인 힘이 없다는 것인데, 녹색당에 호의적인 환경운동단체나 생활협동조합 등의 회원들도 이미 다른 정당을 지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당 당시 5천명의 당원들이 녹색당에 개인적으로 모였고 과반 이상의 당원들이 생애 첫 당원이다. 왜 이렇게 모였을까? 기존 정당에서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기 때문 아닐까?
다만 총선을 치르고 나서 느낀 건 우리가 아무런 정치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의 민낯을 본 것이다. 우리 상황이 민주노동당 초기라고 보면 되는데, 그때보다 더 자산이 없다. 어느 순간 치고 올라오는 단계가 있겠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20명 모두 낙선했다. 우리가 정치적 행위자로서 시민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한 계기가 된 것 같다. 지방선거 평가 워크숍에서 당원들 스스로 평가하기를 경고등이 켜진 상황? 지방선거가 마지막 연습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정연욱 :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의 성적표를 볼 때 일정한 성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 결과는 진보진영의 분열이 대중에게 엄중하게 심판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통합진보당의 정당 지지율과 지금 4개 진보정당의 지지율을 합치면 엇비슷하다. 나눠져 있어서 나눠 받은 것이다. 국민들은 변화를 바라는데 진보정당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냉정한 성찰과 정치적 사색이 필요하다. 지금 진보정치의 재구성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4개로 나눠진 진보정당의 진로가 논의되는 것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 같다."
반복되는 분당 전략, 과연 옳았나?
-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치의 위기 원인으로 지나치게 파편화된 진보정치의 현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 모이신 분들도 하나의 정당에 있다가 4개 정당으로 흩어졌다. 진보정당의 분열, 혹은 분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나? 가장 먼저 분당을 감행한 분께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김종철 : "어떤 시점의 행위를 잘했다고 평가하려면 이후가 잘 되어야 하는데...(웃음) 과거의 역사는 이후 진행과정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2008년 탈당하면서도 '언젠가 반드시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굳이 따져보면 분당이 실패한 것은 진보정치 중 '진보' 때문이 아니라 '정치' 때문이다. 어떤 분은 소선구제가 양당제로 수렴되기 때문에 제3정당은 생존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하시는데, 그럴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제3정당 정치가 굉장히 어렵다. 분당 이후 정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 어렵게 되는 방향으로 흘렀다."
이보아 : "여기 계신 분들에 비하면 2008년 분당 때 약자의 입장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역위원회에서 사무국장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분당되어 버렸다. 나도 분당의 문제의식은 동의하고 있었지만 시점과 방식의 문제를 거론하고 싶다. 2004년에 10명의 국회의원이 배출된 것은 민주노동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바람이 불어서 된 거다. 어쨌든 원내 진출하면서 시민사회나 여러 곳의 진보적 에너지와 자원들이 민주노동당으로 집중됐다. 그만큼 민주노동당은 책임 의식을 가졌어야 한다. 그런데 분당을 꺼내드는 순간 모든 것이 분당이냐 아니냐로 귀결됐다. 분당을 하자고 하신 분들의 문제의식에는 매우 동의했지만 당으로 모인 에너지와 자원을 고려하지 않았고,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대다수의 당원들에게는 선택을 강요한 셈이 됐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이후에도 계속 같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된 것 같다.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이 나오고, 통합진보당에서 정의당이 나오고... 이념적이든 뭐든 그런 게 있었나? 민주노동당은 (하나의 이념을 가진) 이념정당이 아니었다. 헤어지더라도 정면으로 당 내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싸우고 헤어졌어야 했다. 공론화도 제대로 하지 않고 헤어졌다. 갈등을 드러내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쉬운 걸 선택한 거 아닌가?"
김종철 : "사실 드러내 놓고 이야기해보자는 건 분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때 분당 추진파는 반드시 분당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공론화라고 하는 건 머리를 모아보자는 것인데, (당시 분당 추진파들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분당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하다 보니 공론화나 풍부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보아 : "당원 의견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이 문제다. 다양한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로 그러는지도 잘 몰랐다. 그냥 싸우는 것 같으니까 '쟤네들은 쪼개질 수밖에 없어'하는 식으로 보게 된 것 아닌가? 진보정당 전반을 바라보는 불신이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김종철 : "좌파 활동가들이 대단히 강경하게 분당을 밀어붙인 것은 사실이다. 소위 NL-PD운동의 분화로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에 함께 하기 전을 포함해) 20년 동안의 갈등이 감정과 섞여서 폭발했다. 지역위원회 활동가들이 '이대로는 계속 함께 못 간다'고 입장을 계속 올리고 있었다. 이보아 위원장이 사무국장으로 있었던 강남 지역 활동가들이 그런 의견 많이 올렸다.(웃음) 이참에 분당해 버리자는 의견이 전국적으로 많이 올라왔다. 그때는 눈이 뒤집혔다."
- 2008년 분당을 둘러싸고 평등파 활동가들 내부에서도 시각 차이가 많았던 것 같다. 자주파로 분류되었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나?
정태흥 : "우리는 선거를 통해서 변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결정한 정당이고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의 정당이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꿈을 민주노동당에 실었다. 그런 점에서 2008년 분당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선거는 매번 성공하는 게 아니고,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흔들리면 안 된다. 더 전진하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어쨌든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선거 결과와 향후 전망에 대한 불투명성, 각 정파조직 간 역학관계 등이 결합하면서 분당 흐름이 만들어졌고, 대중들에게는 일심회 사건 등을 통해 '종북프레임'이 최초로 전면화하는 계기가 됐다. 진보진영 내에 큰 상처가 남았다. 그때 확산된 종북프레임을 지금 박근혜 정부가 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평등파가) 토론이나 합의, 논의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민주노동당 다수파와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고 저 집단은 화해 불가능한 집단'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한다고 받아들였다. 민주노동당을 같이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분당을 위한 명분을 축적하려 한 것 아니었나? 조승수 전 의원이 선도탈당하면서 (종북)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최대한 민주노동당을 지켜야 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일심회 제명도 분당 명분이었다고 생각한다. 2008년 2월 3일 대의원대회(당시 심상정 비대위가 준비한 2008년 2월 3일 대의원대회에서 일심회 관련자 제명안이 부결되면서 민주노동당 분당이 전면화 된다 – 기자 말)는 민주노동당을 계속 지킬 거냐 말 거냐의 기로였다. 민주노동당을 지키기 위해 심상정안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NL정파가 다수였긴 했으나 NL정파가 아니더라도 그런 식으로 분당하는 건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때 잘못된 것이 현재까지 통합진보당 포함해 진보정당 전체의 족쇄가 되고 있다."
- 2007년 대선 후보 선출, 정파논리였나 당원의 민심이었나?
정연욱 : "권영길 대선 후보 선거운동을 세 번 다 했다. 가장 힘들게 한 것이 2007년 대선이었다. 이 분이 정말 훌륭하시고 상징적인 인물이지만 세 번 내리 하는 게 맞냐는 생각을 했다. 당 내부 경선에서 노회찬 후보가 3위, 심상정 후보가 2위를 했다. 개인적으로는 심 후보가 대선후보 되는 게 어떨까 싶었다. 그렇지만 결국 NL그룹에서 권영길 후보에게 몰표를 준 것이 분당의 계기였던 것 같다. 좌파 동지들이 숨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정태흥 : "2007년 대선후보 선출 과정에 대한 평가에 이견이 있다. 나는 2007년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심상정 후보나 노회찬 후보가 후보 경선에 참여한 것은 굉장히 좋게 봤다. 그렇지만 민주노동당은 권영길당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권영길 대표가 세 번째 출마하는 건 당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노회찬, 심상정의 경선 출마는 권영길 이후를 위해 필요하다고 봤다. NL들이 조직적으로 권영길 후보를 지지한 것이 탈당 원인이라고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심상정, 노회찬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권영길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이 정파 지도부의 힘 때문만은 아니다. 그걸 원하는 당내 정서가 있었다."
김종철 : "솔직히 그 때 NL당원들이 권영길 후보를 지지해서 황당했다. 내가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지역위에서 강연 요청할 때 노회찬 후보를 가장 많이 불렀고 그 다음이 심상정 후보, 그 다음이 권영길 후보였다. 당원들은 노회찬, 심상정이 대중적으로 호소력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NL지도부가 이런 분위기를 (조직적 지지방침을 통해) 뒤집은 것이다. 당내 NL세력이 노회찬, 심상정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등파 성향인) 노회찬, 심상정이 크는 걸 못 보겠다는..."
- 당시 NL계열의 권영길 지지에 노회찬, 심상정에 대한 견제 의도가 있었나?
정태흥 : "타 정파에서는 NL들이 굉장히 조직적으로 일사불란하고 위에서 결정하면 무조건 따르는 사람들로 보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조직적으로 결정하더라도 당원들에게 설득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친다. 정파논리로 일방적으로 내리 먹힌 것은 아니다."
김종철 :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보고 있었다. 워낙 압도적으로 지지세가 바뀌었다. 우리는 NL세력들이 권영길을 내세웠던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가 권영길 후보 비서실장도 했던 사람인데, 그 분이 NL적이지 않다. 그런데 왜 권영길을 내세웠을까?"
정연욱 : "당시 자주파가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자고 논의하는 자리에 있었다. NL그룹 내 일부는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해서 상당한 내홍을 겪기도 했다. 자유 투표를 하자는 의견과 지지후보를 결정하자는 의견 사이의 논쟁도 컸다. 그래도 의견그룹이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아서 내홍이 있었지만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
정태흥 : "당시 자주파는 권영길 후보를 통해 그동안의 정치적 견해를 한번 제대로 실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물론 권영길 후보가 나중에는 우리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았다.(웃음)"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진보대통합, 새로운 분열의 씨앗?
- 2007년 대선 후보 선출과정이 분당을 현실화한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황을 보는 시각 차이가 여전한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따져 보자.(웃음) 그렇지만 2008년 분당에도 불구하고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재통합이 추진됐다. 그러나 이 역시 분당으로 귀결됐다. 통합과정과 이후 분당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정연욱 : "2008년 촛불시위 때 진보진당은 칼라TV로 흥행했고, 민주노동당은 강기갑 의원이 진정성을 인정받으면서 유일하게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국회의원이 됐다. 2008년은 분당 됐지만 이런 걸로 서로 먹고 살았다. 그리고 2010년 진보대통합 논의를 시작했다.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진보신당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국민참여당에는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안이 부결된 것이 당내 민심이었다(2011년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안이 부결된 후, 민주노동당에서는 국민참여당도 통합대상임을 확인하는 안건을 당대회에 올렸으나 15표 차이로 부결됐다 –기자 말).
2011년 진보대통합은 진보진영의 장점을 살리기보다 단점이 불거진 과정이었고,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 역시 이념문제보다 이권이 크게 작용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탈당했을 때 2008년 분당 때 탈당한 진보신당 당원이 '선배님 당에서 나오니까 제 심정 이해하지요?' 하더라. 가슴이 아팠다. 분열과 통합은 모든 운동의 속성이지만, 일정한 방향을 바라보는 힘보다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했다."
정태흥 : "2011년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진보신당과의 선통합을 반대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진보신당과) 선통합을 주장했던 당내 동지들이 지도부를 그렇게 공격한 것이다. 5·31 합의문(2011년 5월 31일에 진보정치대통합을 추진하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을 비롯한 시민단체 간에 합의된 진보대통합 추진 계획안-기자 말)을 도출하면서 민주노동당에서는 이 합의문이 과연 진보신당에서 통과될 수 있느냐에 대한 진단이 다양했다. 결국 통과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합의한 8·28합의문(2011년 8월 28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지도부가 국민참여당 문제가 합의되지 않더라도 9월 25일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창당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합의문-기자 말)도 진보신당 임시당대회에서 부결됐다. 그러면서 (2011년 9월 25일 민주노동당 당대회) 상황이 바뀐 것이다. 총선은 다가오고 있었고, 진보대통합은 총선 전에 완료하자는 계획으로 추진됐다. 그런데 당시 당대회에서 참여당과의 통합안을 부결시켰던 분들이 지금 (참여계와 함께) 정의당에 있다. 동의하기 어렵다."
정연욱 : "우리는 당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진보신당을 탈당해 통합을 준비하고 있는 분들과 같이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국민참여당과 통합을 먼저 하면 그 분들이 합류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당시 당대회에서 민주노총 위원장이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는데, 민주노총 기조실장이 찬성발언을 하고, 권영길 의원이 반대 발언하는데 야유했다. 국민참여당과 통합반대가 아니라 단지 선통합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김종철 :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진보신당하고는 통합하기 싫은데 명분상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실 진보신당이 아니라 인기 정치인인 노회찬, 심상정만 보고 있었다. 지역에서는 통합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2008년 분당을 아쉬워했던 분들도 당시에는 통합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보고 있었다. 우리보다 국민참여당하고 통합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유시민 대표와 이정희 대표가 같이 북콘서트를 하고 다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합의문 해석에도 이견이 있었고.
왜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국민참여당과 그토록 통합하려고 했을까? 서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민주당과 연립정부 등을 통해 야권 주류를 바꾸려는 것이 유시민 대표의 계획이었고,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그것을 이용해서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본다. 결국 통합진보당이 깨진 것도 양쪽 다 아니다 싶으니까 뒤도 안 보고 헤어진 것이다."
* 2편이 이어집니다.
▲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0명을 당선시킨 민주노동당 사무실에 축하화환이 놓여져 있다. | |
ⓒ 권우성 |
"이런 국회의원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4년 총선 이전, 민주노동당의 유인물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문구다. 진보정당 의원 1명이 없었던 시절, 그들은 노동자와 힘없는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새로운 정치를 꿈꿨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자부심은 충만했다. 살아온 배경과 이념적 지향이 다른 사람들이 '공동의 꿈'을 매개로 모였고, 서로를 같은 뜻을 품은 '동지(同志)'라 불렀다.
단 한 명의 '이런 국회의원'을 소망하던 진보정치는 2004년 총선에서 10명, 2008년 총선에서 5명, 2012년 총선에서 13명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맞이했다. 문제는 추세다. 2010년 지방선거에 민주당과 선거연대에 임한 민주노동당은 기초단체장 3석을 포함 모두 142개의 의석을 얻었고, 대부분 독자노선을 고수했던 진보신당은 25개의 의석을 건졌다. 그러나 2014년 6·4지방선거에서는 진보정당 의석을 모두 합쳐 55석에 머물렀다. 기초단체장은 1석도 없고 광역의원도 고작 4개(통합진보당 3개, 노동당 1개)뿐이다.
'위기'는 단지 선거결과로만 진단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정치의제에서 진보정당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모두 모아도 '소수정당'인 진보정당이 4개로 찢어져 있고, 이 정당에 포함되지 않은 '진보정치운동세력'도 상당수다. 더 이상 독자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진단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과연 진보정치의 희망은 있을까?
지난 8월 25일, 합정동에서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 통합진보당 핵심 활동가들이 모였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로 분열을 거듭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구)민주노동당 시절 김종철(노동당)과 이보아(녹색당)는 당내 평등파로, 정연욱(정의당)과 정태흥(진보당)은 자주파로 분류됐다.
이들이 나눈 화두는 두 개다. 진보정치의 '평가', 그리고 '전망'.
"신뢰 사라진 것이 진보정치 위기의 원인이자 결과"
- 오늘 집담회에는 모두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모였다. 지금은 2008년 분당, 2012년 분당 등 큰 사건 이후 녹색당, 노동당, 정의당, 통합진보당에서 각자 활동하고 있다. 직접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민주노동당에서의 활동 경험과 지금 역할을 이야기 해주시면 좋겠다.
▲ 정연욱 정의당 용산지역위원장 "국민들은 변화를 바라는데 진보정당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 |
ⓒ 이고은 |
정연욱(정의당) : "1997년 전국연합에서 국민승리21로 파견되어 정책국장을 맡으면서 진보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민주노동당에는 2001년 입당했다. 김종철씨가 2002년 용산구청장으로 출마할 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고, 2004년 민주노동당 총선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 당 사무부총장과 문성현 대표 비서실장을 거쳐 지방자치위원회 부위원장을 했다.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 때 탈당해서 정의당으로 왔다. 용산지역위원장으로, 지난 지방선거에서 구청장 후보로 출마했다."
정태흥(진보당) :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민주노동당에는 2002년에 입당했고, 2002년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았다. 2005년에는 중앙당 기획국장을 맡았고 2008년 성북구에서 총선 후보로 출마했다. 2010년에 민주노동당 전략기획실장이었고, 2012년 총선에서 성북구(갑)에, 2013년 재보궐 선거에서 노원(병)에 출마했다. 6·4 지방선거에서는 서울시장 후보였다. 지금은 통합진보당 서울시당 위원장이다."
김종철(노동당) : "1999년에 권영길 대표 비서로 국민승리21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과 대변인을 맡았고, 용산지구당 위원장을 했다. 2004년에는 최고위원 겸 연수원장, 2006년에는 서울시장 후보였고 2008년 분당 때 탈당해 진보신당에 참여했다. 2010년에는 진보신당 대변인을 했고, 2011년에 진보신당이 쪼개지면서(2011년 9월, 당내 간판 스타 정치인인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전 의원을 비롯한 당원1~2천명이 진보신당을 탈당해 통합진보당 창당 흐름에 합류했다-기자 말) 2012년에 총선후보로 나갔고, 이번 재보궐 후보로도 출마했다. 공직선거 후보만 5번인데, 당직선거까지 포함하면 선거로 점철된 나날들이었다.(웃음)"
이보아(녹색당) : "민주노동당은 2003년에 입당했다. 당시 민주노총 공공연맹 산하 건설엔지니어링 노조에서 활동하다 다시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로 옮겨 활동하면서 정당활동을 병행했다. 2004년에는 중앙당 대의원을 했고 2006년 소위 '강남좌파'들이 모여 있는 강남구 위원회 사무국장을 했다.(웃음) 2008년 분당할 때 탈당해서 당적 없이 지내다가 2011년 8월 녹색당 창당 준비 시점부터 상근자로 활동했다. 2012년 총선 후 상근을 그만두고 2013년에 탈핵특별위원회를 제안했더니 '제안한 사람이 위원장 하라'고 해서 위원장이 됐다. 가위·바위·보 잘 해서 녹색당 대의원대회 부의장도 했다(녹색당 대의원대회는 전원 추첨으로 선출되는데 의장단은 추천받은 후보 중에서 가위·바위·보로 선정했다- 기자 말).(웃음)"
- 한 정당에 있던 분들이 네 정당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진보정치의 굴곡을 보여주는 것 같다. 먼저 현재 진보정치의 상황을 각 당에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듣고 싶다. 6·4지방선거와 7·30재보궐 선거 이후 진보정치의 위기라는 진단이 팽배하다.
김종철 : "노동당은 내부적으로 보면 2011년 지도부 탈당 이후에 당세가 줄어들고 유력정치인이 없어지면서 '그 당은 뭔가'하는 시선을 많이 느낀다. 솔직히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독자적 진보정당으로 길게 보고 가야한다는 생각은 한다. 당 내에서는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진보재편을 해서 활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과 성급하게 하기보다 갖출 것을 먼저 갖춰야 한다는 입장이 나오고 있지만 둘이 꼭 대립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진보재편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웃음)"
-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원인이 뭐라고 평가하나?
▲ 김종철 노동당 동작지역위원장 "2011년 지도부 탈당 이후 솔직히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는 상황이다." | |
ⓒ 이고은 |
정태흥 : "통합진보당은 2012년 총선 직후에 비례경선부정 관련 사태부터 그 해 9월 분당 사태까지 겪었고, 민주노총이 배타적 지지방침을 철회한 조건에서 박근혜 정부의 외적인 탄압이 계속 있었다. 2013년에 8월 28일 내란음모 사건에 이어 11월 5일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 청구 제소까지 진행됐다. 통합진보당 이름으로 지방선거에 출마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과 위기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출마해 시의원 비례 기준으로 4.3%, 백만 표를 얻었다. 최악의 조건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을 지켜낼 기반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다."
- 통합진보당 내부에서는 선거 평가를 둘러싸고 이견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정태흥 : "울산·부산·경남 등 과거 진보벨트를 형성한 곳에서는 우리가 항상 2당 역할을 했었는데, 이번에 현역 의원이 상당수 낙마했고 3당이 됐다. 호남에서도 우리는 2당이었는데 전북 같은 곳에서는 3당이 됐고 수도권에서는 기초의원 1명만 당선됐다. 이런 데서 오는 위기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강제로 당이 해산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설 기반을 마련하긴 했지만, 곳곳에 위기징후가 존재하기 때문에 힘과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보아 : "우리는 이번이 두 번째 선거였다. 2012년 총선은 창당과 동시에 치른 선거다. 다른 진보정당은 10년의 역사가 있지만, 우리는 창당 자체가 기성 정당과 다른 새로움을 기대한 분들이 모였다. 다른 정당보다 조직적 기반이 없는데, 이게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다. 부정적인 면은 조직적인 힘이 없다는 것인데, 녹색당에 호의적인 환경운동단체나 생활협동조합 등의 회원들도 이미 다른 정당을 지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당 당시 5천명의 당원들이 녹색당에 개인적으로 모였고 과반 이상의 당원들이 생애 첫 당원이다. 왜 이렇게 모였을까? 기존 정당에서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기 때문 아닐까?
다만 총선을 치르고 나서 느낀 건 우리가 아무런 정치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의 민낯을 본 것이다. 우리 상황이 민주노동당 초기라고 보면 되는데, 그때보다 더 자산이 없다. 어느 순간 치고 올라오는 단계가 있겠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20명 모두 낙선했다. 우리가 정치적 행위자로서 시민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한 계기가 된 것 같다. 지방선거 평가 워크숍에서 당원들 스스로 평가하기를 경고등이 켜진 상황? 지방선거가 마지막 연습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정연욱 :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의 성적표를 볼 때 일정한 성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 결과는 진보진영의 분열이 대중에게 엄중하게 심판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통합진보당의 정당 지지율과 지금 4개 진보정당의 지지율을 합치면 엇비슷하다. 나눠져 있어서 나눠 받은 것이다. 국민들은 변화를 바라는데 진보정당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냉정한 성찰과 정치적 사색이 필요하다. 지금 진보정치의 재구성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4개로 나눠진 진보정당의 진로가 논의되는 것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 같다."
반복되는 분당 전략, 과연 옳았나?
-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치의 위기 원인으로 지나치게 파편화된 진보정치의 현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 모이신 분들도 하나의 정당에 있다가 4개 정당으로 흩어졌다. 진보정당의 분열, 혹은 분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나? 가장 먼저 분당을 감행한 분께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김종철 : "어떤 시점의 행위를 잘했다고 평가하려면 이후가 잘 되어야 하는데...(웃음) 과거의 역사는 이후 진행과정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2008년 탈당하면서도 '언젠가 반드시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굳이 따져보면 분당이 실패한 것은 진보정치 중 '진보' 때문이 아니라 '정치' 때문이다. 어떤 분은 소선구제가 양당제로 수렴되기 때문에 제3정당은 생존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하시는데, 그럴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제3정당 정치가 굉장히 어렵다. 분당 이후 정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 어렵게 되는 방향으로 흘렀다."
▲ 이보아 녹색당 탈핵특별위원장 "지방선거에서 녹색당이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시민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 |
ⓒ 이고은 |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이후에도 계속 같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된 것 같다.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이 나오고, 통합진보당에서 정의당이 나오고... 이념적이든 뭐든 그런 게 있었나? 민주노동당은 (하나의 이념을 가진) 이념정당이 아니었다. 헤어지더라도 정면으로 당 내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싸우고 헤어졌어야 했다. 공론화도 제대로 하지 않고 헤어졌다. 갈등을 드러내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쉬운 걸 선택한 거 아닌가?"
김종철 : "사실 드러내 놓고 이야기해보자는 건 분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때 분당 추진파는 반드시 분당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공론화라고 하는 건 머리를 모아보자는 것인데, (당시 분당 추진파들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분당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하다 보니 공론화나 풍부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보아 : "당원 의견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이 문제다. 다양한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로 그러는지도 잘 몰랐다. 그냥 싸우는 것 같으니까 '쟤네들은 쪼개질 수밖에 없어'하는 식으로 보게 된 것 아닌가? 진보정당 전반을 바라보는 불신이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김종철 : "좌파 활동가들이 대단히 강경하게 분당을 밀어붙인 것은 사실이다. 소위 NL-PD운동의 분화로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에 함께 하기 전을 포함해) 20년 동안의 갈등이 감정과 섞여서 폭발했다. 지역위원회 활동가들이 '이대로는 계속 함께 못 간다'고 입장을 계속 올리고 있었다. 이보아 위원장이 사무국장으로 있었던 강남 지역 활동가들이 그런 의견 많이 올렸다.(웃음) 이참에 분당해 버리자는 의견이 전국적으로 많이 올라왔다. 그때는 눈이 뒤집혔다."
- 2008년 분당을 둘러싸고 평등파 활동가들 내부에서도 시각 차이가 많았던 것 같다. 자주파로 분류되었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나?
정태흥 : "우리는 선거를 통해서 변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결정한 정당이고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의 정당이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꿈을 민주노동당에 실었다. 그런 점에서 2008년 분당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선거는 매번 성공하는 게 아니고,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흔들리면 안 된다. 더 전진하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어쨌든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선거 결과와 향후 전망에 대한 불투명성, 각 정파조직 간 역학관계 등이 결합하면서 분당 흐름이 만들어졌고, 대중들에게는 일심회 사건 등을 통해 '종북프레임'이 최초로 전면화하는 계기가 됐다. 진보진영 내에 큰 상처가 남았다. 그때 확산된 종북프레임을 지금 박근혜 정부가 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평등파가) 토론이나 합의, 논의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민주노동당 다수파와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고 저 집단은 화해 불가능한 집단'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한다고 받아들였다. 민주노동당을 같이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분당을 위한 명분을 축적하려 한 것 아니었나? 조승수 전 의원이 선도탈당하면서 (종북)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최대한 민주노동당을 지켜야 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일심회 제명도 분당 명분이었다고 생각한다. 2008년 2월 3일 대의원대회(당시 심상정 비대위가 준비한 2008년 2월 3일 대의원대회에서 일심회 관련자 제명안이 부결되면서 민주노동당 분당이 전면화 된다 – 기자 말)는 민주노동당을 계속 지킬 거냐 말 거냐의 기로였다. 민주노동당을 지키기 위해 심상정안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NL정파가 다수였긴 했으나 NL정파가 아니더라도 그런 식으로 분당하는 건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때 잘못된 것이 현재까지 통합진보당 포함해 진보정당 전체의 족쇄가 되고 있다."
▲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후보와 부인 강지연씨, 심상정 의원, 노회찬 의원이 18일 오후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앞에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
ⓒ 권우성 |
- 2007년 대선 후보 선출, 정파논리였나 당원의 민심이었나?
정연욱 : "권영길 대선 후보 선거운동을 세 번 다 했다. 가장 힘들게 한 것이 2007년 대선이었다. 이 분이 정말 훌륭하시고 상징적인 인물이지만 세 번 내리 하는 게 맞냐는 생각을 했다. 당 내부 경선에서 노회찬 후보가 3위, 심상정 후보가 2위를 했다. 개인적으로는 심 후보가 대선후보 되는 게 어떨까 싶었다. 그렇지만 결국 NL그룹에서 권영길 후보에게 몰표를 준 것이 분당의 계기였던 것 같다. 좌파 동지들이 숨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정태흥 : "2007년 대선후보 선출 과정에 대한 평가에 이견이 있다. 나는 2007년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심상정 후보나 노회찬 후보가 후보 경선에 참여한 것은 굉장히 좋게 봤다. 그렇지만 민주노동당은 권영길당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권영길 대표가 세 번째 출마하는 건 당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노회찬, 심상정의 경선 출마는 권영길 이후를 위해 필요하다고 봤다. NL들이 조직적으로 권영길 후보를 지지한 것이 탈당 원인이라고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심상정, 노회찬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권영길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이 정파 지도부의 힘 때문만은 아니다. 그걸 원하는 당내 정서가 있었다."
김종철 : "솔직히 그 때 NL당원들이 권영길 후보를 지지해서 황당했다. 내가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지역위에서 강연 요청할 때 노회찬 후보를 가장 많이 불렀고 그 다음이 심상정 후보, 그 다음이 권영길 후보였다. 당원들은 노회찬, 심상정이 대중적으로 호소력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NL지도부가 이런 분위기를 (조직적 지지방침을 통해) 뒤집은 것이다. 당내 NL세력이 노회찬, 심상정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등파 성향인) 노회찬, 심상정이 크는 걸 못 보겠다는..."
- 당시 NL계열의 권영길 지지에 노회찬, 심상정에 대한 견제 의도가 있었나?
정태흥 : "타 정파에서는 NL들이 굉장히 조직적으로 일사불란하고 위에서 결정하면 무조건 따르는 사람들로 보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조직적으로 결정하더라도 당원들에게 설득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친다. 정파논리로 일방적으로 내리 먹힌 것은 아니다."
김종철 :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보고 있었다. 워낙 압도적으로 지지세가 바뀌었다. 우리는 NL세력들이 권영길을 내세웠던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가 권영길 후보 비서실장도 했던 사람인데, 그 분이 NL적이지 않다. 그런데 왜 권영길을 내세웠을까?"
정연욱 : "당시 자주파가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자고 논의하는 자리에 있었다. NL그룹 내 일부는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해서 상당한 내홍을 겪기도 했다. 자유 투표를 하자는 의견과 지지후보를 결정하자는 의견 사이의 논쟁도 컸다. 그래도 의견그룹이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아서 내홍이 있었지만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
정태흥 : "당시 자주파는 권영길 후보를 통해 그동안의 정치적 견해를 한번 제대로 실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물론 권영길 후보가 나중에는 우리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았다.(웃음)"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진보대통합, 새로운 분열의 씨앗?
- 2007년 대선 후보 선출과정이 분당을 현실화한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황을 보는 시각 차이가 여전한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따져 보자.(웃음) 그렇지만 2008년 분당에도 불구하고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재통합이 추진됐다. 그러나 이 역시 분당으로 귀결됐다. 통합과정과 이후 분당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정연욱 : "2008년 촛불시위 때 진보진당은 칼라TV로 흥행했고, 민주노동당은 강기갑 의원이 진정성을 인정받으면서 유일하게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국회의원이 됐다. 2008년은 분당 됐지만 이런 걸로 서로 먹고 살았다. 그리고 2010년 진보대통합 논의를 시작했다.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진보신당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국민참여당에는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안이 부결된 것이 당내 민심이었다(2011년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안이 부결된 후, 민주노동당에서는 국민참여당도 통합대상임을 확인하는 안건을 당대회에 올렸으나 15표 차이로 부결됐다 –기자 말).
2011년 진보대통합은 진보진영의 장점을 살리기보다 단점이 불거진 과정이었고,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 역시 이념문제보다 이권이 크게 작용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탈당했을 때 2008년 분당 때 탈당한 진보신당 당원이 '선배님 당에서 나오니까 제 심정 이해하지요?' 하더라. 가슴이 아팠다. 분열과 통합은 모든 운동의 속성이지만, 일정한 방향을 바라보는 힘보다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했다."
▲ 정태흥 통합진보당 서울시당 위원장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방침 철회에 이어 내란음모 사건, 정당해산 청구제소까지 진행됐지만 당을 지켜낼 기반을 만들었다." | |
ⓒ 이고은 |
정태흥 : "2011년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진보신당과의 선통합을 반대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진보신당과) 선통합을 주장했던 당내 동지들이 지도부를 그렇게 공격한 것이다. 5·31 합의문(2011년 5월 31일에 진보정치대통합을 추진하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을 비롯한 시민단체 간에 합의된 진보대통합 추진 계획안-기자 말)을 도출하면서 민주노동당에서는 이 합의문이 과연 진보신당에서 통과될 수 있느냐에 대한 진단이 다양했다. 결국 통과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합의한 8·28합의문(2011년 8월 28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지도부가 국민참여당 문제가 합의되지 않더라도 9월 25일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창당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합의문-기자 말)도 진보신당 임시당대회에서 부결됐다. 그러면서 (2011년 9월 25일 민주노동당 당대회) 상황이 바뀐 것이다. 총선은 다가오고 있었고, 진보대통합은 총선 전에 완료하자는 계획으로 추진됐다. 그런데 당시 당대회에서 참여당과의 통합안을 부결시켰던 분들이 지금 (참여계와 함께) 정의당에 있다. 동의하기 어렵다."
정연욱 : "우리는 당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진보신당을 탈당해 통합을 준비하고 있는 분들과 같이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국민참여당과 통합을 먼저 하면 그 분들이 합류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당시 당대회에서 민주노총 위원장이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는데, 민주노총 기조실장이 찬성발언을 하고, 권영길 의원이 반대 발언하는데 야유했다. 국민참여당과 통합반대가 아니라 단지 선통합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김종철 :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진보신당하고는 통합하기 싫은데 명분상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실 진보신당이 아니라 인기 정치인인 노회찬, 심상정만 보고 있었다. 지역에서는 통합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2008년 분당을 아쉬워했던 분들도 당시에는 통합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보고 있었다. 우리보다 국민참여당하고 통합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유시민 대표와 이정희 대표가 같이 북콘서트를 하고 다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합의문 해석에도 이견이 있었고.
왜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국민참여당과 그토록 통합하려고 했을까? 서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민주당과 연립정부 등을 통해 야권 주류를 바꾸려는 것이 유시민 대표의 계획이었고,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그것을 이용해서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본다. 결국 통합진보당이 깨진 것도 양쪽 다 아니다 싶으니까 뒤도 안 보고 헤어진 것이다."
* 2편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집담회는 김은희, 박래훈, 강시원, 안영선, 오은혜, 정규식, 김보연, 윤지선, 이승철, 홍기웅, 홍명근님의 후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속기·정리: 정경윤, 사진: 이고은, 장소후원: 정치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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