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영석 씨와 백자 씨의 이번 공연 내용, 음악인으로서의 삶과 고민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문화노동자’ 연영석 씨의 이야기를 싣고자 합니다. 백자 씨의 글에 이어 공연이 끝난 후에는 공연 내용을 독자들과 나눌 예정입니다.
연영석 씨는 1993년에 밴드 ‘메이데이’에 노래 가사를 써주는 것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여 <돼지 다이어트>(1집, 1999년), <공장>(2집, 2001년), <숨>(3집, 2005년) 총 세 장의 음반을 발표하였습니다. 2006년에는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을 수상하였고, 2007년에는 영화 <필승 ver2.0 연영석>(감독 태준식)에서 자신의 삶을 직접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동행 콘서트’는 연영석 씨의 단독콘서트는 아니지만, 2005년 3집 음반 발매 기념콘서트 이후 사실상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처음 대중들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음악이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보여주고 싶다는 연영석 씨의 이번 공연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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꿋꿋하지 않으면서 울지도 않는 운동권 얘기
“나는 비겁할 수도 있고 너무 무기력했지만 나는 이럴 수도 있고 자꾸 희미해지지만
울지 않네 울지 않네 울지도 않네 울지도 않네......”
‘동행콘서트’를 일주일 남겨둔 3월 8일 저녁. 연영석 씨와 반주자(기타 고명원, 베이스 박우진, 건반 이지은, 드럼 장석원)의 합주로 연습실 공기가 후끈 달아올라있다. 한 곡 한 곡 합주가 끝날 때마다 가수와 반주자들 간에 의견이 오고간다.
“운동권 얘기야. 말라버린 운동권 얘기. 감성이 메마른 거야. 꿋꿋하지 않으면서 울지도 않고. 밴드라서 편곡을 이렇게 한 거야.”
“내가 어두운 데서 생각에 빠져갖고 있어. 골목 하나 들어섰는데, 거긴 벚꽃이 핀 거야. 슬퍼. 나만 그러고 있었던 거야. 사람들은 색동옷 입고 팔랑팔랑한 옷을 입고 어깨에다 애 메고 꽃을 들고 다녀. 운동권이 그래. 마약 먹은 것처럼 해야 되는데... 특히, 고 부분에서 노래 안 부르는 부분에서 그런 느낌이 나야 되거든. 고걸 표현하고 싶은데...”
2005년 경에 만든 이 노래는 자신만의 별을 안고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고 자기 세계에 빠져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운동권에 관한 노래다. 이 노래는 아직 제목이 없다. 노래를 만들 당시 <광장에 서다>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번 ‘동행콘서트’에서 다시 정해 선을 보일 예정이다.
▲ ‘동행 콘서트’를 앞두고 합주중인 연영석 씨와 반주자들 |
코미디언 지망생에서 ‘문화노동자’가 되기까지
밤 11시 합주가 끝나고 연습실 인근 국밥집에서 가수와 반주자, 기획자가 늦은 저녁을 먹는다. 배가 부르면 소리내기가 힘들어 공연이나 연습 전에는 가급적 음식을 먹지 않는데, 요즘은 너무 안 먹으면 어지러워서 공연 전에 김밥을 조금 먹기도 한다.
연영석 씨는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2살 때 서울에 올라와 신림동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시골에서 보낸 덕에 시골 생활이 낯설지는 않다. 시골에 보내 달라고 부모님에게 떼를 쓰기도 했었다. 서울과 괴산을 오가며 고모들과 밭일을 하거나 메뚜기를 잡아 화로불에 구어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릴 때부터 노래와 미술을 좋아했고, 초등학교 때는 합창반 활동을 하면서 합창대회 나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다른 과목은 양을 받아도 미술과 음악은 수를 받았다.
“예능 프로에 한 번 나와 보는 게 내 꿈이야. 내가 이쪽 판에 홍서범이잖아.”
▲ 늦은 저녁 식사 중에 이야기하고 있는 연영석 씨 |
연영석 씨의 어릴 때 꿈은 코미디언이었다. 뒤늦게 미술학원을 다녀 미대 진학을 위해 재수하던 시절에 KBS 코미디언 공채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경험도 있다. 대본을 외워 심사위원들 앞에서 연기를 하는데, 심사위원들 앞에 서니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나와 버렸다. 연기자의 꿈을 버리지 못한 연씨는 당시 신촌 크리스탈백화점 위에 있는 모 극단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을 보기도 했으나 떨어졌다. 그러고 나서 ‘4수’ 끝에 미대 조소과에 들어간다. 미대 재학 중에 조각가 故 구본주 씨를 만나 친구가 되어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함께 운동을 했다. 대학 졸업 후에 1993년에는 노동문화 기획 등 현장활동을 하는 ‘문화예술생산자연합’에서 대표이자 조각팀 ‘현실감각’ 메버로 4년 동안 활동했다.
‘문화예술생산자연합’ 활동 중에 밴드 ‘메이데이’에 노래 몇 곡을 만들어준 경험이 있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무대에 서서 노래를 하게 된다. 1996년에 문화예술생산자연합 회원이던 밴드 ‘천지인’ 콘서트에 오기로 했던 윤도현 씨가 수해를 당해 오지 못하게 되자 연영석 씨가 ‘땜빵 공연’으로 무대에 올라 <라면>과 <구르는 돌> 등을 부른 게 그의 가수 첫 데뷔무대였다. 그는 기타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다. 잘 데가 없어 친구 사무실에서 자다가 거기에 있던 기타를 혼자 쳐보다가 노래를 만들고, 밴드 ‘메이데이’ 멤버들이 기타 연주하는 걸 옆에서 보기도 하고 쳐보기도 하면서 기타를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단다.
“이 단체가 해산하고 나서 내가 뭘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돈 벌고 살까? 취직해서 살까? 운동판을 떠나긴 싫고. 내가 음악을 좋아하니까 현장에서 기타 하나 들고 노래 부르면 동지들이 밥은 줄 테니까 돈은 없어도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면 되지 않겠나. 음악 좋아하는 마음 하나 현장에 다니고 싶은 마음. 그렇게 시작한 게 그게 지금까지 온 거죠.”
미술에서 음악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조각 작업이 규모가 커서 현장성이 떨어지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가수 활동을 시작하면서 ‘문화노동자모임’이라는 일인조직을 만들기도 하고, 노동문화정보센터 운영위원 활동을 하기도 했다. 연씨가 ‘문화노동자‘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이때부터다.
“‘예술가’가 나쁜 말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어요. 예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곡되면서 상품으로 존재하게 되었잖아요. 예술은 문화권력이 있을 때만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어요. 본연의 몫을 잃은 거죠. 많은 예술가들은 골방에서 돈을 떼이면서 어렵게 버티고 있는 현실이고요.”
그는 적든 많든 자신이 노동력의 대가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문화노동자’라는 말을 쓰기로 한다. 그렇게 해야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거란 믿음도 있었다. 노동가수로 활동을 시작한 후에 처음 공연 섭외를 받은 곳이 민주노총 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였는데, <라면> 등 그의 노래를 들은 노동자들이 몹시 황당해했단다. “쟤는 우리 편 같은데 노래는 시원찮아. 노동자 얘기 한마디 없고 이상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때는 ‘내가 정말 문제가 많은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의 노래를 좋아해준 것은 노동자들보다는 단체활동가들이었다.
통기타 빠져도 되면 춤추면서 노래 불러야지
“근황은 똑같애요. 애보다 공연 다니다, 애보다 공연 다니다...”
2010년 민중가수 지민주 씨와 결혼하여 태어난 아이가 이번 주부터 어린이집에 가는데, 그 시간동안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단다. 예전 같으면 공연료 주는 데는 부담스러워서 안가기도 했는데, 식구가 생기니 먹고 살기 위해 전보다는 덜 가리게 된 것이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다보니 부모님에 대해 2~30대 때와는 다른 미안한 감정이 생긴다. 특히, 큰 감정이 없던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살갑게 대해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많이 걸린다. 경제적으로는 잘 못해드려도 자주 찾아뵙고 손주도 보여드리고 말이라고 잘 해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중이다.
“이번 공연은 나는 약간 재밌게 할라 그랬는데, 될지 모르겠어. 원래는 좀 댄스틱 하게 할라 그랬어. 지은 누나가 건반 치니까 난 통기타 안치고 춤추면서 노래 할라 그랬는데. 다음 주에 해보고, 통기타 빠져도 되면 내가 춤추면서 노래 불러야지.”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연영석 씨는 10대 때, 모던토킹(Modern Talking)과 스모키(Smokie) 음악 등 유로댄스(Eurodance)류의 댄스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가리봉동과 난곡동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다니면서 춤을 추었다. 그는 ‘운동하고 사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번 ‘동행 콘서트’는 연영석 씨의 단독콘서트는 아니지만, 2005년 3집 음반 발매 기념콘서트 이후 사실상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처음 무대에 오르는 자리다. 에너지도 많이 줄고, 해도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아 돈 낭비 하는 것 같아 콘서트를 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살아왔다.
이번 ‘동행 콘서트’에서는 <라면>(1집), <공장>(2집), <죽은 시인>(3집), <허우적되다>(신곡), <하루>(신곡), 아직 제목을 붙이지 못한 신곡 등 총 8곡을 부를 예정이다.
태어나서 처음 만든 노래 <라면>은 후배 연습실에 얹혀 살 때, 빈 냉장고와 라면을 먹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당시 삼척에서 사살당한 공비의 가방에서 나온 라면 봉지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만든 노래다. 큰 냉장고 안에 먹을 게 없는 우리의 현실을 빗댄 노래이기도 하다. <공장>은 부가 세습되는 라인이 있는 공장과 같은 사회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노래이며, 신곡 <허우적되다>는 늪에 빠진 것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사는 우리의 삶을 담은 노래다. 2006년경에 만든 <허우적되다>에는 ‘운동판’에서 자기 혁신을 하지 못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려 하는 자신의 모습도 담겨있다. 2009년 몸과 마음이 힘들어 시골에 머물면서 만든 노래 <빨래>는 이번 공연에서 <하루>라는 제목으로 다시 선보인다.
▲ 합주가 끝난 후에 반주자들과 함께. 윗줄 좌측부터 장석원 씨(드럼), 고명원 씨(기타), 이지은 씨(건반), 연영석 씨, 박우진 씨(베이스) |
자기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거예요
이번 콘서트에서는 민중음악을 하는 백자 씨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 연영석 씨는 깊이 있고 자신의 진심을 담아 묵묵히 음악을 해오는 백자 씨의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친화감을 가지고 있고, 여백이 있어요. 소위 민중가요 판 내에서 싱어송 라이터로서 자기 음악적 길을 가는 뮤지션들이 많지 않거든요. 그런 사람의 하나죠. 자기 음악 색깔을 갖고 현장에 대해 자기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백자는 클럽에서도 열심히 하고 있죠.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 자기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거예요.”
게스트로는 ‘회기동 단편선’이 무대에 오른다. 연영석 씨는 ‘회기동 단편선’이 전통적인 노동가요나 민중가요의 맥과 다르면서, 보통의 인디뮤지션들과도 다른 결을 갖고 있다고 본다. 힘들 수도 있는데, 음악과 사회운동에서 자기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인단다. 연영석 씨는 이번 콘서트가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결합하고, 소통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난 아직 젊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진화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고 싶은 욕망도 있어요. 백자도 마찬가지고, 단편선은 더 무한한 가능성이 있죠. 호철이형(김호철)이 만든 <단결투쟁가> 같은 투쟁가들은 노동자와 자본이 있는 한 영원히 필요할 거에요. 우리는 그 방식이 아니더라도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그 얘기를 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거고요.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쉽진 않을 거에요.”
그는 가을까지 예정되어 있는 ‘동행 콘서트’ 공연하는 뮤지션들이 ‘어떤 공연 하나 초대받았다, 나한테 어떤 공연 생겼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고 무엇을 새롭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면 좋겠다는 제안도 한다. 그것은 연영석 씨가 개인적으로 공연을 흔쾌히 할 수 없는 에너지 상태임에도 이번 콘서트에 동참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연대하는 그 동지들이 우리 음악에 연대해주면 안될까?
그는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들도 누군가의 가족이거나 연인일 것이며, 올라가기 전에는 그 사람들에게도 밥을 먹고 술도 먹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삶이 있었을 거라고 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란다.
“나라는 사람이 현장에서 노래를 부를 때, 그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몇몇 노래가 다가 아니에요. 나는 슬프기고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어떨 땐 기운이 넘치기도 하고. 애하고 지지고 볶이고, 마누라하고 지지고 볶기도 하고, 돈 때문에 안절부절 하기도 하고 그러고 산단 말이에요.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자기 길을 만들어 가는가 하면, 포기하고 싶다가도 다시 오기가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아집을 부리기도 하면서 버텨가는 것처럼. 우리 음악도 그렇게 버텨가는 거지. 내 음악도 그렇게 버텨가는 거지. 그런 걸 살짝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연영석 씨는 비록 단독 콘서트가 아니라 충분치는 않겠지만, 집회장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시간이 되면 와서 ‘쟤가 저런 음악을 하는구나. 쟤는 저런 걸 좋아하는구나. 저것도 괜찮네. 저건 별로야.’ 하고 가면 좋겠단다. 물론, 이 역시도 바쁘면 안와도 된단다.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약한 모습이나 비굴한 모습도 소중하다. 내 동지가 그런 모습을 보여줬을 때, “쟤는 저런 놈”인 게 아니라 “너 좀 쉬어. 내가 할게” “나 힘들어. 니가 좀 해” 이렇게 해서 균형을 맞춰 가면 좋겠단다. 그래야 사람이 숨을 쉬고 살지 않겠냐고.
“우리는 운동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 음악도 하는 사람이잖아요. 현장에서 부르는 노래는 딱 한정돼 있잖아. 세 곡, 길어봐야 네 곡. 짧으면 두곡. 그것도 아는 노래. 추우면 내 노래 중에서 그나마 신나는 거 몇 곡 하고 마는 건데. 우리 동지들이 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그렇게만 보는 거잖아. 때로는 ‘저 사람들이 내 음악에 대해서 아나?’라는 의혹이 생길 때가 있어. 내 음악에 대해 궁금해라도 하나? 어떨 때는 그런 게 많이 섭섭할 때도 있지. 우리가 연대하는 그 동지들이 우리 음악에 연대해주면 안될까 하는 아쉬움이 솔직히 있지. 그렇지만... 그래도 늘 같이 하지 못하니까 미안하지.”
모으고 쌓아두는걸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
그는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공연 소식을 알리지 못한다. 페이스북 친구가 4천 명이 넘지만, 여태 홍보 글 한번 올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모 한다 알리는 거 그런 걸 못해.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이거야. 올래면 오고 말래면 마라 이거야. 머릿속에는 그런 게 필요하다는 걸 알어. 모르면 바보지. 때로는 사람들이 몰 좋아하는지도 알지. 알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거는 어쩔 수 없지. 난 어렸을 때부터 뭘 모으고 쌓아두는걸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 비우는 스타일이지. 학교 다닐 때는 가방도 안 들고 다녔고, 대학교 다닐 때 미대 나왔지만 공구도 없었어. 그게 내 체질인거지.”
결혼 전에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12만 원 짜리 옥탑방에 살 때는 이불 대신 옷을 덮고 자기도 했다. 밴드 ‘천지인’에서 준 이불을 가져와 옥상에서 발로 밟아 빠는데, 빨아도 빨아도 때국물이 계속 나와 결국 포기하고 그냥 말려서 덮고 잔 일도 있다. 집안에 짐이라고는 박스에 올려놓고 쓰는 컴퓨터 한 대가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고 있는 지금, 사회생활을 하고 살아가기 위해 기획을 잘 하고 자리도 만들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게 머리로 생각은 하는데, 행동이 잘 안된단다. 그렇게 하는 게 어색하고, 자신과 잘 안 어울리는 것만 같다. 취재를 하면서 자료로 참고하려고 했던 그의 개인 홈페이지 ‘게으른 피’가 없어진 것을 알고 적잖이 당황했다. 후배가 만들어준 홈페이지에 그가 업데이트를 하며 운영을 해오다가 몇 년 전에 귀찮고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없애버렸다 한다. 자료 보존 기간 통지를 받았지만, 백업을 할 줄도 모르고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해 그냥 두었더니 자동 폐쇄가 되었단다.
그는 이런 인터뷰도 어색하다고 했다. 쑥스럽기도 하지만, 거리에서 고공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미안해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가 나의 인터뷰에 응하는 건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간 내서 찾아온 나에 대한 배려 때문임을 안다. 그런 그의 배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가능한 ‘소박한’ 인터뷰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연영석. 그는 참 미안한 게 많은 사람이다. 개인적인 힘듦 때문에 ‘셀프 안식년’을 받아 시골에 내려가서 쉬었던 2009년에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그가 처음으로 ‘운동판을 쌩까고’ 고향에 내려가서 편안함과 미안한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만들었던 노래가 이번 공연에서 부를 <하루>(구 ‘빨래’)라는 노래다.
▲ 명동 거리공연에서 노래하는 연영석 씨 |
어거지로 사는 거 너무 싫어요
연영석 씨는 자신의 음악이 이전에 비해 부드러워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 <코리안 드림>처럼 강한 음악은 넣지 않았단다. 지금은 노래 만들 때, 예전처럼 센 음악은 안 나온단다.
“제 음악이 단순하고 거칠고 직설적이기도 한데, 제가 봐도 그런 면이 많이 줄은 거 같애요. 그거는 제가 나이가 든 것도 있고, 제 정서가 변한 것도 있고, 제 관점이 바뀐 것도 있을 거고. 전 보다는 약간 냉정해진 측면도 있고. 그전에 뜨거운 면이 강했는데, 그땐 그게 괴로웠어요. 지금은 내가 식어가는 거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지금은 그걸 받아들이기로 해서 그전보단 편해요. 그런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안에서 활동하면 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어요.”
음악을 계속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음악을 안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고 싶단다. 그에게 기타를 메고 노래하는 일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그걸 거창하게 얘기할 필요도, 너무 왜소하게 얘기할 필요도 없다. 미술을 그만두고 음악을 한 것에 대한 후회도 없다. 미술이 다시 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다시 음악이 하고 싶으면 음악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리’에 연연하지만 않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음반발매 역시 마찬가지다. 연영석 씨의 스타일상 쌓아둔 곡을 정리하면서 음반을 내는 스타일인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음반 낸지 십년 가까이 됐으니까 내야 되는데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게 억지로 되는 건 아니에요. 때 되면 하겠죠. 때 되면 낼 거고. 그래야 어거지가 안돼요. 나는 어거지로 사는 거 너무 싫어요. 우리 세상이 어거지로 사는 세상인데 나도 어거지로 살아서 모 하겠어요. 사람들 나름대로 몫이 있는 거에요. 누구를 위해 살았단 얘기 별로 신뢰하지 않아요. 결곡 자기를 위해 하는 거지.”
낮이면 햇볕을 쬐고 밤이면 별을 세다 잠들고 난 자꾸 단순하고 가볍구나
아무런 이유도 없고 아무런 상관조차 없는 듯 난 그러고만 싶은데 왜?
- <하루>
‘현장’과 ‘음악’ 사이의 딜레마
개인적으로 연영석 씨의 음악을 접한 것의 8할 이상은 집회와 문화제 등 거리에서다. 2006년 연영석 씨는 'ebs 스페이스 공감' 인터뷰에서 ‘자신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게 현장’이라고 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 ‘현장’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웬수죠. 웬수. 그전에는 그렇게 얘기 안했는데... 그 전에는 현장의 에너지를 받고 음악 한 게 많아요. 지금은 솔직히 못 받아요. 현장이 내 음악에 에너지를 주지 못해요. 그게 힘들어요. 제가 요즘 작업을 잘 못하는 이유도 그중 하나에요. 만약에 현장이 나에게 종교라면 어느 순간 종교적 신념이 약해져버린 거죠.”
지는 게 태반이고, 이기는 것도 껍데기처럼 되어버린 현실 노동운동을 보면서 그는 고민이 많다. 예전에 꿈꿔왔듯이 거대한 힘으로 맞서야 하는데, 운동은 점점 소규모화 되고 ‘총파업’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결국 개인에게 모든 기대를 거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누군가 고공에 올라가면 그 탑을 숭배하듯이 바라보고 그 밑에서 노래 부르고 모여서 소리 지르는 현실이 속상하다.
▲ 쌍용자동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이 110일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15만 볼트가 흐르는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 송전탑 |
“옛날에는 민중가요 노동가요 하면 현장성이라는 게 컸잖아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어요. 물론, 여전히 현장이라는 건 중요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키워드가 돼야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음악은 음악 나름대로 길이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서 오는 갈등과 자기 딜레마가 있어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에 있고, 누가 오라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그곳에 간다. 현장은 말 그대로 그와는 ‘애증’의 관계다. 최근 인디밴드 같은 뮤지션들이 투쟁 현장에 와서 공연하는 것이 고맙고, ‘내가 설 자리를 뺏긴다’가 아니라 같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고민도 있다.
“늘상 여기서 함께 하는 동지들(민중가수들)은 늘상 있는 사람들이고, 인디밴드는 가끔 오는데 뭔가 신기하고 반가운거지. 그때 민중가수들이 약간 섭섭함을 가지기도 하지. 어떻게 보면 가끔 와서 한번 씩 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관대하고, 늘상 하는 사람들에게는 관대하지 않은 게 우리 모습이기도 하거든요.”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감내할 부분도 있겠지만, 기존 민중가수와 인디밴드가 갖고 있는 연대방식의 차이가 현장의 힘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슬기롭게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로 그가 제시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예의다. 요즘 그는 ‘관계’에 관심이 많다.
“아이들 프로그램에는 서로 칭찬해주고 도와주는 관계가 많이 나와요. 근데 ‘우리 운동판’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서로 헐뜯고 뭉개뜨리고 찍어 눌러서 자기 정체성을 살려내려고 하고. 어느 순간 이렇게 되어버렸어. 더 이상 동지에 대한 애정도 없잖아. 수년을 같이 투쟁해도 서로 대화도 안하고 벽 만들고, 소통도 안하고. 연대 단위들은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 이해관계만 생각하고. 너무 운동이 삭막해진 것 같아요.”
명동 거리공연은 가장 편안하고 나와 어울리는 공간
3월 11일 저녁, 명동성당 앞에서 ‘명동 들불장학회’가 하는 거리공연에서 연영석 씨를 만났다. 아이를 돌보다가 아내와 교대를 하고 왔단다. ‘명동 들불장학회’는 부평 대우자동차 정리해고(2001년) 문제를 계기로 2002년 산재·해고·이주노동자·장애인 자녀들의 장학기금 마련을 위해 만들어진 모임이다. 박준·권영주·김대원·김종환·다름아름·연영석·이씬·처절한기타맨 등의 문화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명동 들불장학회’는 매주 월요일 저녁 명동성당 앞에서 모금을 위한 거리공연을 하고 있다. 연영석 씨는 명동 거리공연이 노동자 자녀들을 도와주고 나누는 의미도 있지만, 공연을 하는 자신들에게 이곳은 하나의 문화적 거점이라고 이야기한다.
“투쟁현장 다니면서 노래 부르는 거 말고 우리에게는 일상적으로 노래 부를 곳이 없잖아요. 콘서트를 늘 할 수 있는 여력도 안 되고. 여기는 열린 공간이에요. 노래를 하고 싶거나 뜻을 같이 하면 누구나 와서 함께 하면 되거든요. 명동은 내가 노래 부르는 곳 중에 가장 편안하고 나하고 가장 어울리는 곳이에요.”
음향장비 세팅하고 공연 중에도 마이크며 조명 상태를 체크하느라 바쁜 민중가수 박준 씨에게 격려의 말을 요청했다.
“가서 보고 싶어요. 연영석은 인정 안하는데, 저는 연영석 팬이걸랑요. 어디서든 잘 할 거라고 보고요. 다만 제가 가서 보질 못 하는 게 늘상 미안하고 아쉽죠. 저는 개인적으로 영석이 노래의 가사들을 참 좋아해요. 열심히 해라. 영석아. 언제나 응원한다. 내가 너의 팬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박준 씨는 아침에 연습을 할 때, 늘 연영석 씨의 <노란선 넘어 세상>을 부른다고 했다. 연영석 씨를 가까이서 본 세월이 많기에 어디서 뭔가 한다고 하면 소식은 다 알고 있는데, 현장 일정들 때문에 가보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연영석 씨는 자신의 공연에까지 와서 사람들이 결기를 느끼고 갈 필요는 없을 거라고 했다. 그저 오는 사람들이 잘 쉬고 놀다 가면 그것으로 족하단다. 뮤지션에게 공연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것이지만, 보는 사람들은 뮤지션의 그런 과정을 슬프면 슬픈 대로 즐겁게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즐겁게 빠져들면 좋겠단다.
▲ 명동 거리공연이 끝나고 공연자와 관객들이 함께 |
“‘음악이란 이런 거’라는 생각은 없어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음악이고,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음악을 통해 하고 있는 거죠. 예술은 삶의 언어이자 방법이에요. 음악은 내가 느끼는 만큼 표현하는 내 삶의 그릇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하는 만큼은 내가 즐겁고 싶고, 새롭고 싶어요. 내 음악이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이번 공연에서 바람이 있다면 제 음악이 오는 분들의 삶에 잠시라도 조금의 여유가 됐으면 하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