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

국화꽃은 이제 피지도 않았으면… [기고] 15번째 죽음, 쌍용차 고 강종완을 떠나보내며(2011.5.13)

참된 2013. 1. 3. 18:30

국화꽃은 이제 피지도 않았으면…
[기고] 15번째 죽음, 쌍용차 고 강종완을 떠나보내며
2011년 05월 13일 (금) 권지영 edit@ilabor.org    금속노동자

 

 

 

하필이면 그 심장이 멈출 때 입고 있던 옷이 쌍용차의 작업복 상의였습니다. 이미 바뀐지 오래 되었는데... 그 작업복을 입고는 저 공장에 들어 갈 수도 없을텐데... 몸서리쳐지게 계속되는 죽음이 자꾸만 비와 함께 짝을 지어 찾아오는 것이, 괜히 그것이 화가 나 망할놈의 비가 왜이리 내리냐고 짜증을 내다가 멀쩡하게, 너무나 멀쩡하게 봄볕이 반짝이는 쌍용차의 공장앞에서 고인에게 국화 한 송이를 올리고 돌아서면서 아~ 이렇게 좋은 봄날에 젊디젊은 노동자가 허망하게 가버리는구나 하며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 '공장으로 돌아가자' 제발 공장으로 돌아가자! 이젠 더 이상 죽지않고 살아서 그리고 넘지 못하는 이 정문을 넘어 공장안으로... 이명익 기자<노동과 세계>

 

 

영정사진 속 그 사내의 생김은 내 손으로 쓴 사표이니 어디 가서 억울하단 소리, 힘들단 소리 한번 못하게 그렇게 우직하게 생겼습니다. 그 영정 앞에 자그마한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다, 뱉어내다를 반복하는 그의 아내 또한 어쩌면 그리 똑같이 순하게만 생겨먹었을까요?

 

하필이면 쌍용차 작업복을…

 

‘너는 어차피 해고라고... 그냥 일찌감치 희망퇴직을 선택하면 분사업체에 취업시켜주겠다고, 그러다 회사사정 좋아지면 젤 먼저 불러주겠노라고’ 그리 착하게 생겼으니 그런 말에 그냥 억울함을 속으로 꾹 누르며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겠지요. 93년에 입사해 꼬박 16년을 제 집처럼 다녔던 그 회사를요. 그는 회사의 사탕발림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동료들의 생존권과 후배들의 장래를 위해 희망퇴직을 선택한, 어쩌면 쌍용자동차를 가장 사랑한 2200명이 넘는 희망퇴직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 고개를 떨군 동지, 절망 앞에 주저앉은 가족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춰야 할 필요충분조건. 이명익 기자<노동과 세계>

 

 

워낙에 타고나길 부지런하고 성실한 이라 했습니다. 원래 타고난 성격도 말없이 무뚝뚝하게 궂은 일 마다 않는 이라 했습니다. 눈뜨면 나가야되는 회사에서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강제로 등 떠밀려 집에 주저앉은 후 일년을 맘을 못 잡고 힘들어했다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차곡차곡 그의 심장에 희망퇴직 쓰지말고 한번 싸워나 볼 걸 하는 후회의 생채기가, 왜 내가 해고자로 지목되어 희망퇴직자로 불려야 하는지 하는 원한의 생채기가, 약속된 무급자들도 들어가지 못하는 걸 보며 정말 안되는구나 하는 절망의 생채기가 짙게 새겨졌겠지요. 그게 그렇게 무섭게 병이되어 몸으로 온 것입니다.

 

회사의 사탕발림, 거짓인 줄 알면서도

 

‘무관하다’합니다. 쌍용차에 다니다 죽은 것도 아니요. 고용관계가 유지되는 사람도 아니니 관계없다. 그리 말하기 쉽습니다. 희망퇴직자는 자기들이 사표 쓴거니 그렇고 무급자야 회사상황이 아직 안좋으니 받을 수 없고, 해고자는 정리해고 된 것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말하면 됩니다. 저들에겐 참 쉬운 세상입니다.

 

 

 

   
▲ 손에 들려져야 할 노동자의 때묻은 장갑이 15번째 죽음을 맞이한 절망의 공장 앞에 떨어져 있다. 이명익 기자<노동과 세계>

 

 

고등학교 3년을 같이 다녀도 두고두고 보고 싶은 친구가 됩니다. 잔정없고 무뚝뚝한 남자들이지만 한 공장서 15년, 16년을 일했던 동료들입니다. 형동생으로 종일 라인을 타며 차에 붙어 일을 하고 퇴근길 소주한잔에 고단한 하루 노동을 부어 마시던 그 사이가 산자와 죽은자로 나뉘었습니다. 또다시 희망퇴직자, 무급자, 해고자로 다 갈기갈기 찢겨져 버렸습니다. 같은 아파트 한 동에 살아도, 속앓이 하는 소리가 집밖으로 새나와도, 서로 알은체도 못하도록 맘이 병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책임을 우리는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그건 누구의 잘못입니까?

 

정말로 다 죽어나가야, 그래야지만 이 지독한 시간이 끝이 나는 걸까요? 이렇게 못된 말을 뱉어내는 제가 진저리납니다. 희망없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옮겨다니는 바이러스같은 이 죽음이 이제는 제발 끝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과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쌍용차를 바라보며, 기다리며, 희망하며 그러다가 꺾여 쓰러져 갈 것인지 하는 무서운 상상이 두머리 달린 괴물처럼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 구호를 외치진 않겠습니다. 구호가 그를 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자들은 오열하는 유가족들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쌍용자동차에서 일할 때 입었던 작업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는 해직된 지 2년이 됐지만..." (쌍용차 노제 사회자 발언 중). 이명익 기자<노동과 세계>

희망없는 이들에게만 옮겨다니는 바이러스 

 

마지막! 죽음은 이제 마지막이어야겠죠... 죽음의 공장으로! 줄줄이 사람을 죽어나가게 만든 공장으로! 그런 이름으로 쌍용차가 불리워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제발 너무나 새 것이라 오히려 낯선 그 정문을 열고 우리의 이야기를 귀기울이고 들어야 합니다. 억울과 절망이 몸속에 쌓여 차안에서, 베란다에서, 욕실에서, 안방에서, 쌍차의 부품을 빨간날도 없이 만들어내던 하청공장 휴게실에서, 그렇게 사람이 싸늘하게 식어가도록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삶이 바닥으로 내쳐졌습니다. 마음이 망가졌습니다. 우리를 보십시오. 해고가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회사가 그 답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공장안에 버티고 앉아 우리를 나몰라라 한다면, 우리와 상관없다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죽어나가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이만큼 했으면 우린 더 한 짓을 해도 아무도 손가락질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린 우리가 안타깝고 또 안타깝지만 2년이나 지났는데도 버리지 못한 고인의 작업복 상의처럼 우리가 이토록 처절하게 다시 희망을 부여잡는 것은 저 공장에 보란듯이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그렇게 복직의 꿈을 이뤄 허무하게 떨어져버린 목련꽃잎같은 먼저간 우리 동료들과 그의 아내들의 맺힌 마음까지 풀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 그냥 회사 관뒀어요’ 고작 그 한마디로 그 아프고 쓰린 속을 가족들에게 보이지 않고 혼자 힘들었던 고인... 당신의 그 아린 죽음이 그냥 몇 번째의 죽음이 되지 않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고인앞에 다짐을 하는 약속은 더는 안할랍니다. 다시 또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모질고 모진 회사를 만나 고생많았습니다. 부디 이제는 편안하시기를... 그저 이 말 밖에는...

 

권지영 / 쌍용차 가족대책위 대표